특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1960년대 가요계 정상에 올랐던 오기택의 리즈시절. 사진출처=박성서 대중문화평론가.
특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1960년대 가요계 정상에 올랐던 오기택의 리즈시절. 사진출처=박성서 대중문화평론가.

[ K trendy NEWS = 윤상길 주필 ] 23일 오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수 오기택은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가수였다. 묵직한 저음이 매력이어서 ‘저음의 마술사’로 불렸으며, 이 저음이 잘 드러난 ‘영등포의 밤’, ‘아빠의 청춘’, ‘고향무정’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오기택의 삶은 굴곡이 많았다. 1939년 전남 해남군 북일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해남중학교 시절에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보낸다. 의탁할 사람은 서울의 외삼촌뿐, 그 슬하에서 성동공고 기계과를 마쳤다.

그는 1960년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노래를 배우다가, 1961년 KBS 제1회 직장인 노래자랑에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대표로 참가, 1등을 차지하며 가요계에 데뷔한다.

KBS TV로 중계된 이 노래자랑을 지켜본 당대 최고의 작곡가 김부해가 그를 픽업해 자기가 문예부장으로 있던 신세기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음반 없는 지망생과 전속 계약을 맺는 일은 당시로서는 이채로운 일이다. 이때 그가 받은 계약금은 거금 5,000원,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오기택의 앨범 재킷
오기택의 앨범 재킷

그리고 1962년 오기택은 ‘영등포의 밤’으로 정식 데뷔한다.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1963년 해병대에 입대해 1965년 전역하는 공백이 있었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후 1966년 ‘아빠의 청춘’을 비롯해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 ‘우중의 여인’, ‘비 내리는 판문점’, ‘마도로스 박’ 등 우리나라 1960년대를 대표하는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1966년에는 남궁원 엄앵란 주연 영화 ‘아빠의 청춘’(감독 강민호)에도 출연했다. 당시 그의 인기는 ‘동백아가씨’ 이미자와 견주기도 했다.

‘영등포의 밤’은 왜색 가락으로 지목돼 금지되기도 했으며, 1972년 은방울자매가 리메이크했다. 이 노래가 탄생한 지 48년 만인 2010년 노래비가 영등포에 세워졌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문화광장에 세워진 ‘영등포의 밤’ 노래비 제막식에 노래의 주인공 오기택은 휠체어에 몸을 의탁한 채 참석했다. 그는 1996년 바다낚시를 갔다가 사고로 크게 다쳐 건강이 악화했다. 이후 지병으로 치료를 받다 최근 증세가 악화해 유명을 달리했다.

2013년 서울 올림픽홀에 전시된 ‘기록으로 보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 1960년대 패널 앞에서(왼쪽), 2018년 고향에 세워진 인 ‘고향무정’ 노래비 앞에서 오기택. 사진출처=박성서 대중문화평론가.
2013년 서울 올림픽홀에 전시된 ‘기록으로 보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 1960년대 패널 앞에서(왼쪽), 2018년 고향에 세워진 인 ‘고향무정’ 노래비 앞에서 오기택. 사진출처=박성서 대중문화평론가.

그는 1979년 한국연예협회(현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앞장섰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골프선수로서도 활동했던 그는 특히 1981년부터 3년간 전국체전 전남 대표로 출전, 단체 금메달과 개인 1위 등 3관왕을 차지했다.

해남이 낳은 불세출의 가수 오기택을 기리는 ‘오기택 전국가요제’가 2007년부터 매년 해남에서 열리고 있다. 또한 ‘해남 땅끝마을 내 고향’ 노래를 직접 작사했을 만큼 해남을 사랑했던 오기택은 고향 후배들을 위해 남은 재산 전부를 해남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증했다. 그는 평생 미혼으로 지냈다.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했고 고향을 빛낸 오기택을 기려 해남군은 2018년 그의 고향마을에 ‘고향무정’ 노래비를 세웠으며, 오는 4월 말에는 ‘고향 무정’ 노래비 옆에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가 글을 쓴 ‘오기택 기념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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