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Insight 시계 ①] 협업의 역설, 리차드 밀 × 페라리, 그 매혹의 이면
매출을 위한 협업, 의미 없는 연결의 반복 그래서, 이 시계는 팔리나?
[KtN 박준식기자]‘협업’이라는 단어는 한때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하이엔드 시계 업계에서 협업은 더 이상 실험이 아니라 전략, 더 정확히는 판매를 위한 반복된 공식이 되었다. 리차드 밀(Richard Mille)과 페라리(Ferrari)의 RM 43-01 Tourbillon Split-Seconds Chronograph Ferrari는 그 전형적인 사례다. 기술적 디테일, 한정판의 희소성, 그리고 슈퍼카 브랜드의 아우라를 입은 이 시계는 외견상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동시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 이 조합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그러면 시계가 팔립니까?”
공학적 집착과 브랜드 신화의 결합
RM 43-01은 페라리 엔진 블록에서 따온 구조적 라인, 클러치 휠에 착안한 무브먼트, SF90 스트라달레의 디자인 언어까지—시계 전체가 페라리의 기술과 심미성을 모방한다. 다이얼은 대시보드, 스트랩은 차량 시트, 나사 하나조차 크랭크케이스의 공학을 반영했다. 하지만 이런 디테일의 과잉은 때로 기능적 가치를 압도한다. 이 시계가 ‘시간을 보여주는 물건’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 ‘페라리를 연상시키는 구조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획된 희소성, 소비되는 이야기
75개 한정 생산. 그것도 미세블라스트 티타늄과 카본 TPT®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뉘며, 각각 루이스 해밀턴과 샤를 르클레르의 캐릭터를 반영한다는 내러티브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소비자에게 과연 설득력을 갖는가. 오히려 기획된 서사와 과잉된 콘셉트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오히려 희석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협업은 시계라는 오브제를 둘러싼 감성적 서사를 강화할 수 있지만, 지금의 협업들은 ‘디자인적 오마주’ 이상의 깊이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말하자. RM 43-01은 팔릴 것이다. 심지어 곧 완판될 가능성도 크다. 왜냐하면 이 시계는 단지 제품이 아니라 자산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밀의 협업 모델은 구매와 동시에 투자 대상으로 기능하며, ‘희소성’이라는 속성이 수집가 시장에서 높은 프리미엄을 보장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시계’가 팔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만든 이야기가 팔리는 것이다.
협업이라는 이름의 피로감, 기능적 내실이 사라진 시대
시계 업계의 협업은 이제 정체성보다는 주목도, 미학보다는 재무 지표에 가깝다. 단기 매출을 위한 협업은 가능하다. 그러나 브랜드의 긴 호흡에서 중요한 건, 진정성 있는 기능성과 철학의 결합이다. 리차드 밀과 페라리의 조우는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브랜드 신화 간의 동행이 아닌, 마케팅 서사 간의 타협처럼 보인다.
진정한 협업이란, 브랜드 간의 기술, 가치, 철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제 시계 업계는 “누구를 위한 협업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