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트렌드 기획②] 비상계엄의 잔영, ‘영현백’과 국가위기 시스템의 정치화

2025-03-26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 내란 정국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군의 시신 수습용 ‘영현백’ 대량 구매 정황이 정치권에 충격을 던지고 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발언 이후 드러난 비정상적 국방 조달 기록은 단순한 행정 행위가 아니다. 이 정황은 헌정질서가 ‘국가 비상 체계’라는 이름 아래, 정치화되고 있다는 위험 신호이며, 과연 대한민국이 통상적 민주주의 국가인지 되묻게 한다. 지금 정치가 직면한 질문은 명확하다. 비상 대응인가, 위기 조장인가.

비상구매의 이면, ‘영현백 6,000개’가 던진 질문

정치권에 파장을 불러온 것은 ‘물자’였다. 지난해 말, 그리고 올해 3월. 군은 총 6,200여 개에 달하는 시신 수습용 가방, 이른바 ‘영현백’을 구입했다. 연평균 1천 개 남짓에 불과했던 구매량이 비상계엄 선포 정황과 맞물려 두 차례 폭증한 것이다. 그것도 공개입찰이 아닌 ‘긴급공고’라는 예외적 방식으로 처리됐다.

이 구매는 물리적 수치 이상이다. 그것은 ‘전시 대응 시뮬레이션’에 준하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군은 “예비용”이라고 해명했지만, 대통령의 계엄 언급과 동시에 발생한 조달 행위는 국가가 특정 비상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였다는 정황을 제공한다. 영현백은 군사 용품이 아니라, 권력의 불안이 실체화된 상징으로 읽히고 있다.

위기관리 시스템의 ‘역전’, 권력 유지 도구로서의 비상인프라

민주주의 국가는 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비상관리 체계를 운용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정치가 마주한 현실은 다르다.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위기를 호출하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 계엄군 투입, 국회 진입 시도, 군 헬기 이동 등 작동된 권력의 매뉴얼은 헌정 질서의 최후 수단이 아니라, 정권 유지를 위한 전략 자산처럼 사용되었다. 이는 계엄의 의미가 헌정 수호에서 권력 수호로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국가위기 대응 체계가 ‘민주적 통제’가 아닌 ‘정무적 조작’으로 변질된 것이다.

특히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 지연과 맞물려, 정치적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이 비상 시스템은 ‘사실상의 통치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 실제로 시민사회는 계엄 재선포 가능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고 있으며, 군 조달 행위의 시점과 내용에 대한 조사가 촉구되고 있다.

[속보] MBC "대통령실, 비상계엄 담화 생방송 4시간 전부터 준비… KTV에 긴급 요청" 사진=2024 12.14  KTV 영상(12월 3일)  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정보의 비대칭성과 국민 불신, ‘국방의 정치화’가 남긴 것

국방의 본질은 ‘신뢰 기반’이다. 그러나 계엄 시도 정황과 영현백 대량 구매는 그 신뢰를 구조적으로 붕괴시켰다. 국방부와 청와대는 이례적 조달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회피하고 있으며, 실제 계엄 계획의 실행 여부나 군의 가동 단계에 대한 실체적 정보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정보 비대칭 상황은 극단화되고 있다. 시민은 국가를 의심하고, 정치는 국방을 도구화하며, 군은 침묵 속에 전략적 자산으로 기능하는 구조다. 정보가 봉쇄되고 해명이 지연될수록,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전제인 ‘시민적 통제’는 실종된다. 군의 물류 목록이 ‘정치 메시지’로 해석되는 지금, 국방은 이미 정쟁의 한복판에 있다.

헌정질서와 군의 거리, 지금 그 간격은 충분한가

정치는 질문을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헌정은 그렇지 않다. 영현백은 단순한 물자가 아니다. 그것은 비상 상황에 대비한 국가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누구에 의해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 제기다. ‘시민을 위한 통치’가 아닌 ‘권력을 위한 통제’가 우선되면, 헌정은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물류 감사나 해명이 아니다. 이는 헌법기관 전체가 민주적 통제와 헌정의 지속 가능성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구조적 사안이다. 군의 ‘침묵’은 정치의 무책임과 만나 헌정의 공백을 낳고 있으며, 시민의 불신은 극단적 정치화로 전이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위기 대응 시스템은 헌법적 명령에 따라 구성되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권력의 사적 유지를 위한 동원’으로는 작동되어선 안 된다.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민주주의는 시스템의 손에 의해 와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