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기획⑤] 정체성을 수출하다

K-디자이너 브랜드와 글로벌 시장의 ‘감성 정치학’

2025-03-27     임우경 기자
Andersson Bell, 혼성 정체성의 전략화. 사진=Andersson Bell,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K-콘텐츠의 글로벌 확장 흐름 속에서 패션은 뒤늦게, 그러나 가장 섬세한 방식으로 세계 시장에 도착하고 있다. 특히 K-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새로운 전략으로 주목받는다. 이들은 단순히 한국적 미학을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성적 서사와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국제 패션 산업의 언어를 재구성하고 있다.

MINJUKIM, 내면성의 정제된 조형

디자이너 김민주는 과장된 디테일과 서정적 실루엣으로 ‘조용한 강함’을 구축해온 브랜드 MINJUKIM을 통해 K-패션의 섬세한 내러티브 전략을 대표해왔다. 넷플릭스 쇼 <넥스트 인 패션> 우승 이후 글로벌 인지도를 확보한 그는, 단순한 쇼케이스를 넘어 ‘감성의 조형성’이라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체화하며 세계 시장에 입체적으로 접근했다.

MINJUKIM의 강점은 내면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능력이다. 풍성한 러플과 구조적 셰이프는 여성성의 전형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장치로 기능하며, 한국 전통복의 흐름과 현대적 실루엣이 교차하는 경계 지대에서 독자적 미감을 구축한다. 그의 디자인은 ‘한국성’을 명시적으로 강조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점에서 세계 시장에서의 수용성이 높다.

Andersson Bell, 혼성 정체성의 전략화. 사진=Andersson Bell,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Andersson Bell, 혼성 정체성의 전략화

한편, Andersson Bell은 명확히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탈(脫)국가적인 전략으로 글로벌 진출에 성공한 사례다. ‘서울과 스칸디나비아의 감성 결합’을 내세운 이 브랜드는 감성적 이질성과 양가성(ambivalence)을 하나의 미학적 전략으로 전환했다.

Andersson Bell의 실루엣은 과감하지만 구조적이고, 컬러는 절제되어 있으나 서사적이다. 최근에는 런던, 파리 등 유럽 시장에서의 입지를 확장하며, 브랜드 내러티브를 더욱 다층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캠페인을 통해 ‘도시 정체성의 유동성’을 시각화하고, 한국 청년 세대의 불안과 자유를 패션으로 번역해내는 방식으로 글로벌 소비자에게 접근하고 있다.

정체성’은 콘텐츠인가, 전략인가

K-디자이너 브랜드들이 활용하는 ‘정체성 정치’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로 이는 브랜드의 서사를 더욱 고유하게 만들고, 글로벌 브랜드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감성적 텍스처를 부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정체성이 지나치게 전략적으로 소비되거나 표면적 ‘K-이미지’에 의존할 경우, 브랜드 고유의 깊이를 상실할 위험도 내포한다.

또한 한국적 미감을 전면화하지 않으면서도 ‘감성의 기원’은 한국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방식은, 일종의 미묘한 문화 외교 전략처럼 작동한다. 이는 오늘날 ‘문화 브랜딩’이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둘러싼 담론의 일부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Andersson Bell, 혼성 정체성의 전략화. 사진=Andersson Bell,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패션은 이제, 정체성의 언어다

MINJUKIM과 Andersson Bell의 사례는 ‘K-패션’이라는 용어가 이제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내러티브 구조와 감성적 전략의 총체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정체성을 외부에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감성과 사회적 경험을 패션이라는 언어로 풀어낸다. 바로 이 점이 글로벌 패션 시장에서 K-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독보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다.

궁극적으로 K-패션의 확장은 정체성을 매개로 한 감성 정치학의 성립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한국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있으며, 그 언어는 말이 아니라 옷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더없이 우아한 방식으로 세계를 설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