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트렌드] 말이 가벼운 리더십, 철회가 반복되는 정치
안철수 의원의 자기부정과 한국 정치 시스템의 ‘기억 상실증’
[KtN 박준식기자] 정치의 위기는 말에서 시작된다. 정치는 말로 설계되고, 말로 책임지며, 말로 흔들린다. 최근 안철수 의원의 발언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인이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고, 현재의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재조립하는 ‘정치적 기억 상실증’의 사례다. 그 반복된 자기부정은 결국 신념이 없는 리더십, 구조를 갖추지 못한 야권의 현실, 그리고 유권자가 감당해야 할 정치 피로의 구조적 근원을 드러낸다.
안철수 의원은 이재명 대표의 발언을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 비판은 명확한 철학이나 기준 없이 날아간 정치적 레토릭에 가깝다. 말의 비판이 의미를 가지려면, 말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비판이 도달한 곳은 상대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다. 이재명 대표를 향한 ‘사회주의적 사고방식’ 비판은, 과거 장하성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를 인용하며 재벌개혁을 주장했던 2012년의 안철수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러면 그때의 그는 반(反) 시장주의자였는가? 아니면 지금의 그가, 과거 자신을 지우고 있는가?
탈원전 비판, 그러나 과거 자신은 신재생 확대론자였다
에너지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안철수 의원은 탈원전 정책이 전기요금 인상의 원인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2017년 대선 당시 그는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당시 그에게 쏟아졌던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그가 야당 대표에게 던지는 비난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즉, 그는 지금 자신이 했던 주장에 분노하고 있는 셈이다. 그 말은 과거를 지우고,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적 단절의 언어다. 정치인이 과거의 자신과 충돌할 때, 책임이 아니라 정당화만 반복된다면 그것은 말의 폐기와 리더십의 붕괴로 이어진다.
리더십은 입장이 아니라 기억 위에 세워진다
정치인은 입장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바뀐 입장은 과거에 대한 해명과 일관된 논리를 전제로 해야 한다. 안철수 의원은 늘 떠났고, 늘 철회했고, 늘 설명하지 않았다. 이 고질적 반복은 정치인의 개인적 문제이자, 야권 정치 구조에서 전략 없는 리더십 공백이 낳은 상징적 결과다.
입장을 바꾸는 데 신념이 없다면, 리더십은 그저 자기 홍보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국민은 말의 논리를 기억하지만, 정치인은 말의 위치만 바꾸고 있다. 이런 리더십은 정치적 책임감이 아닌 생존 반사 신경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정치가 '기억을 거부할 때' 발생하는 구조적 피로
정치인은 자신이 말한 것을 가장 먼저 잊는다. 그러나 유권자는 기억한다. 그리고 언론은 그 기억을 추적해야 한다. 안철수 의원의 자기부정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 기억의 부재’ 문제다.
정치적 말의 신뢰는 그것이 유지된 시간으로 증명된다. 말과 말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아지고, 서로를 부정하는 주장이 반복된다면, 유권자는 정치를 분석이 아닌 피로로 소비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정치 불신이 반복되고, 대안 없는 정당 정치가 지속되는 구조적 원인이다.
철수의 정치, 말의 정치, 그리고 리더의 조건
안철수 의원은 지금 정치에서 ‘말의 무게’가 사라졌을 때 어떤 리더십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과거와 충돌하는 현재, 입장을 설명하지 않는 변화, 그리고 비판을 반복하면서도 책임은 거부하는 태도는 정치인의 자격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리더십은 단지 지금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말에 책임지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정치 시스템이 그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한, 정치인은 철회하고 부정하고 반복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인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기억하는 시스템이며, 기억 위에 세워진 리더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