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디지털 통화의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바꾸는 세계 금융의 권력 지도

2025-04-01     최기형 기자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CBDC) 발행이 본격화되면서, 테크 기업과의 본질적인 충돌이 시작됐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최기형기자] “누가 돈을 발행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돈의 흐름을 통제하는가가 세계의 권력을 바꾼다.” 이제 통화는 종이가 아니라 코드다. 금융의 중심이 중앙은행에서 민간 플랫폼으로 이동한 이 시대에, 전통적 통화 질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그 핵심에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있다. CBDC는 단지 ‘현금을 디지털로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금융 주권, 경제 통제력, 지정학적 영향력이라는 전면적 권력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늦은 출발, 그러나 여전히 중심에 있는 달러

미국은 아직 본격적인 디지털 달러를 발행하지 않았다. 연준은 ‘디지털 달러 프로젝트’를 시험 중이지만, 상업은행 시스템의 붕괴 가능성과 금융사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 등으로 CBDC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한 ‘기술 기반 국제결제 시스템’ 구축에는 속도를 내고 있다. IMF, BIS와의 공동 실험, 스위프트(SWIFT) 기반 CBDC 연계 시스템 테스트 등은 기존 달러 체제를 디지털로 이식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다. 미국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그 영향력은 여전히 세계 결제 시스템의 중심에 머물고 있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통화 외교’다

중국은 가장 먼저 CBDC를 상용화한 국가다. 디지털 위안화(e-CNY)는 이미 대도시에서 실생활 결제에 사용 중이며, 2024년 말 기준 사용자는 3억 명을 넘었다. 그러나 진정한 목표는 국내 소비 편의가 아니라 ‘위안화 국제화’의 지름길 확보다. 일대일로 국가들에 디지털 위안 결제 시스템을 제공하고, 중앙아시아·중동·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통화 블록’을 형성하려는 전략은, 미국 달러 중심 질서에 대한 실질적 도전이다. 특히 브릭스(BRICS)를 중심으로 디지털 통화 협력체가 등장하면서, ‘탈달러 디지털 축’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학적 의미가 크다.

유럽과 기타 국가들, ‘디지털 중립 지대’ 형성 시도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 유로화를 2026년 도입 목표로 설계 중이며, ‘현금과 보완 관계’라는 원칙 하에 소비자 중심의 설계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데이터 감시와 사생활 침해 우려를 완화하려는 유럽식 접근법이다. 한편, 인도, 브라질, 나이지리아 등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CBDC를 실험 중이다. 특히 인도는 국경 간 송금과 소액 결제의 국가 통제 모델을 시험하면서,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금융 주권’ 실험에 나서고 있다. 이처럼 미국-중국 중심의 양극 질서 외에도, 디지털 통화 질서에서 ‘비동맹 블록’을 자처하는 국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금융 시스템의 미래, ‘탈은행화’와 ‘재중앙화’의 충돌

CBDC의 등장은 금융 민주화를 약속하는 동시에, 금융 통제의 재중앙화를 불러온다. 개인 계좌를 중앙은행이 직접 관리하는 구조는 기존 상업은행 시스템을 흔들 수 있으며, 국가가 통화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의 정치화’가 가속되고 있다. 한편, 민간 암호화폐는 탈중앙화를 표방하지만, 금융 안정성과 통화정책 운용의 관점에서 각국 정부의 견제를 받고 있다. CBDC는 이 둘 사이에서 통제 가능성과 효율성을 모두 확보하려는 절충적 수단이지만, 그 설계와 운용 방식에 따라 사회 전체의 금융 생태계가 바뀔 수 있다.

한국의 위치: 기술은 앞서지만 전략은 모호하다

한국은행은 2024년부터 디지털 원화의 모의실험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급결제 인프라와 블록체인 연동 실험도 병행 중이다. 하지만 정책 목표는 여전히 ‘기술 개발’에 머물러 있으며, CBDC의 국제적 연계성과 통화 주권 전략은 미진하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금융 소비자 환경과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이를 통화 전략의 일환으로 확장하는 데 있어 외교적 상상력과 정치적 결단이 부족하다. 디지털 원화가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닌, 금융 주권과 국가 안보의 전략 자산으로서 설계되어야 하는 이유다.

CBDC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이다

CBDC는 디지털 시대의 ‘화폐 냉전’이다. 어느 국가가 먼저 발행하느냐보다, 어떤 국가가 글로벌 거래의 기준 시스템을 설계하느냐가 핵심이다. 기술의 문제는 이미 해결 단계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디지털 통화 외교’와 ‘통화 패권 전략’에 대한 국가적 시나리오다. 우리는 이제 ‘누가 돈을 찍느냐’보다 ‘누가 돈의 흐름을 통제하느냐’를 묻는 시대에 있다. CBDC는 금융의 미래를 넘어, 국가 권력과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