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기획②] 울마크상 파이널리스트 8인의 실험 ‘지역성’과 ‘물성’의 재조합으로 확장된 패션 서사
글로벌 신진 디자이너들이 메리노 울로 구축한 동시대 조형언어와 로컬 내러티브
[KtN 임우경기자] 2025 국제 울마크상은 단순한 창의성의 경합이 아닌, 지역성과 물성의 조화를 통해 미래 패션의 새로운 문법을 탐색하는 실험의 장이었다.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된 8인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과 조형 언어를 바탕으로, 메리노 울이라는 동일한 재료를 통해 전혀 다른 시간성과 서사를 직조해냈다. 이들의 작업은 패션이 더 이상 중심과 주변, 유럽과 비유럽의 구도로 나뉘지 않는 시대, ‘섬유의 로컬리티’가 어떻게 세계적 담론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ACT N°1 (이탈리아)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조형화
ACT N°1은 중국계 디자이너 루카 린(Luca Lin)과 갈라리오 아오스(Galib Gassanoff)의 듀오 브랜드로, 이주와 혼종성의 서사를 중심에 둔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메리노 울을 활용해 이중 구조의 드레이프, 비대칭 커팅, 전통 치파오에서 차용한 실루엣을 결합했다. ‘기억의 중첩’이라는 콘셉트로 구성된 이 작품은 옷을 일종의 다층적 기억 구조물로 제시하며, 섬유가 문화적 정체성을 담지하는 방법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Diotima (미국) 카리브 해 전통과 모던 니트의 융합
Diotima는 자메이카계 디자이너 레이첼 스콧(Rachel Scott)의 브랜드로, 카리브 해 여성 노동자의 전통적 크로셰 기술을 메리노 울로 재해석했다. 그녀의 니트는 단순한 직물의 질감을 넘어, 식민의 기억과 자율성, 그리고 공동체 노동의 미학을 구현한다. 섬유 하나하나에 서사가 깃든 작업은 미국 패션의 다문화적 기반을 시각적으로 구조화한 실험으로, 지역성과 기술의 감각적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Duran Lantink (네덜란드) 물성에 대한 급진적 상상력
듀란 란팅크는 이미 본상 수상자로서 주목받았지만, 그 실험의 본질은 ‘재료 그 자체의 조형적 역량’을 추동했다는 점에 있다. ‘Duranimal’ 컬렉션은 외골격 구조의 드레스를 통해 의복의 공간성 개념을 확장했으며, 이는 네덜란드 디자인 전통인 실용성과 실험성이 절묘하게 맞물린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접근은 ‘기능’을 해체하고, ‘형태’로 옷을 재조립하는 현대 조형의 경향과 맞닿아 있다.
Ester Manas (벨기에) 바디 포지티비티와 유니버설 디자인
에스터 마나스는 메리노 울을 통해 모든 체형을 포용하는 실루엣 실험을 전개했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신축성과 유연성을 강조한 디자인으로, 울의 기능성과 심리적 착용감을 결합했다. 마나스는 “울은 그 자체로 체형에 적응하는 생명력을 가진다”고 말하며, 옷이 어떻게 인간의 다양성과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를 제시했다. 벨기에 디자인의 사회적 감수성이 섬유 차원에서 구현된 대표적 예다.
LGN Louis Gabriel Nouchi (프랑스) 문학에서 구조로, 섬유의 언어화
루이 가브리엘 누치의 컬렉션은 프랑스 고전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정제된 남성복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메리노 울은 이 과정에서 감정과 정형성을 동시에 전달하는 조형 언어로 기능한다. 그는 구조적 재단과 감각적인 감촉의 이중성을 통해 ‘이성과 감성의 섬유적 통합’을 시도하며, 프렌치 패션의 고전성과 현대성을 연결하는 독창적인 변주를 선보였다.
Luar (미국) 브롱크스의 거리성과 울의 하이브리드
라우르의 창립자 라울 로페즈(Raul Lopez)는 브롱크스 출신의 라틴계 디자이너로, 도시 하위문화와 포멀한 울 소재를 충돌시켰다. 스트리트웨어의 실루엣에 메리노 울의 질감을 결합한 디자인은, 소외된 문화와 고급 섬유의 융합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링을 넘어, 패션이 어떻게 계급성과 공간성을 재조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으로 읽힌다.
Meryll Rogge (벨기에) 규범 해체적 장식주의
메릴 로지의 울 활용 방식은 전통적인 장식적 요소를 전복하는 방식에 있다. 유럽 귀족의 복식에서 착안된 실루엣에 비정형적 컷과 자수, 과장된 숄더 라인이 결합되어, 메리노 울이 지닌 전통성을 과감히 재구성한다. 그녀는 “울은 규범을 파괴하기에 가장 우아한 재료”라고 말하며, 장식성과 급진성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특유의 조형 전략을 구축했다.
Standing Ground (영국/아일랜드) 고대 조각에서 추출된 현대적 미감
마지막으로 스탠딩 그라운드는 고대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드레이핑 기법을 울로 재현했다. 그리스 조각의 주름, 켈트 전통 문양, 그리고 현대적 재단 기술이 결합된 이 컬렉션은, 전통과 기술, 유럽 내 지역문화의 세분화된 재해석을 통합적으로 구현했다. 메리노 울은 이 흐름 속에서 ‘시간을 담은 섬유’로 기능하며, 패션이 시간적 층위를 구축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만든다.
로컬리티는 스타일이 아니라 구조다
이번 파이널리스트 8인의 작업은 하나의 메시지를 명확히 전한다. ‘지역성(Locality)’은 단순한 장식적 모티프가 아닌, 디자인의 구조와 물성 해석에 내재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여준 메리노 울의 다층적 실험은, 세계 패션 산업이 점차 '글로벌 기술의 표준화'가 아닌 '로컬 감각의 다원화'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섬유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조형 언어이자 문화의 텍스트이며, 디자이너가 사유하는 가장 본질적인 매개체다. 국제 울마크상은 이제 ‘소재의 미학적 민감성’과 ‘문화적 층위’를 함께 읽어내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지역성과 물성의 경계는 더욱 유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재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