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트렌드] ‘공산주의자’ 망령의 귀환… 한국 정치 언어의 퇴행과 민주주의 감수성의 실종
색깔론의 반복, 권력 언어의 악순환은 어떻게 민주주의의 공적 가치를 훼손하는가
[KtN 최기형기자]국회 본회의장에 또 한 번 낡은 망령이 등장했다. 이름은 ‘공산주의자’.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단어가 아닌, 한국 정치 언어의 후퇴를 상징하는 상징 코드다. 2025년 4월 3일,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 촉구 결의안 논의 과정에서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은 민주당 의원을 향해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을 던졌다. 부의장의 발언 취지 설명 기회를 거부한 채 본회의장을 떠난 박 의원은 이후 “마은혁 후보자를 지칭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의 핵심은 단순한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 언어가 국가의 심의기관에서 다시금 ‘낙인’과 ‘혐오’를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구조적 징후가 문제다.
정치 담론의 퇴행… 색깔론의 부활은 ‘공공성 감수성’의 실종
박 의원의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나 정치적 과잉 표현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이는 2020년대 중후반, 한국 정치의 구조적 위기, 특히 ‘민주주의 감수성’의 실종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이다. 정파 간 이념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혐오와 이분법적 낙인은 공론장을 점령하며 합리적 논의를 압도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더 이상 냉전기 이데올로기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향해 던지는 레토릭의 무기이며, 민주주의 정치가 필수로 가져야 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언어’의 부재를 보여준다.
정치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결국 ‘말의 윤리’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상대의 존재를 말로 부정하는 순간, 정치는 권력 투쟁의 구도로 전락하고, 공공의 신뢰는 붕괴된다.
반복되는 역사… 4.3, 5.18을 외면한 ‘기억의 정치’
이 발언이 더욱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발언이 있던 날이 4.3 사건 77주기였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자 척결’이라는 명목 아래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역사, 그리고 그 피해자들에게 씌워졌던 동일한 낙인을 떠올릴 때, 박 의원의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닌 역사적 무지에 기반한 위험한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국민의힘 일각에서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해당 발언을 두둔하는 흐름은 또 다른 차원의 경고 신호다. 공적 책임을 지는 정치인의 언어가 사적 자유의 테두리로 방어될 때, 정치 담론은 더 이상 공론의 장이 아니라 정략의 무대가 된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의 왜곡, 계엄령 논란과 함께 극우 언설의 일상화와도 맞닿아 있다.
언어의 구조적 폭력… 책임 없는 발언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한국 정치에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의 기술’로 활용되어 왔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거나 침묵시키는 이 언어 구조는 곧 폭력의 전조다. 특히 국회라는 제도 정치의 심장부에서조차 이러한 언어의 퇴행이 방치될 때, 민주주의의 내구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박 의원의 발언은 정치적 무책임의 대표 사례다. 그것은 한 개인의 도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당 내부의 거버넌스, 언어 통제의 실패, 정치인의 윤리 교육 부재가 결합된 구조적 실패로 봐야 한다. 이러한 발언이 반복적으로 용인될 경우, 국회는 혐오를 정당화하는 플랫폼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정치 언어의 민주화 없이는 헌정 질서의 회복도 없다
정치 언어는 민주주의의 건강을 가늠하는 척도다.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헌정 질서와 시민 존엄에 대한 모욕이다. 지금 한국 정치는 말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상대를 배척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인정할 수 있는 언어적 감수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박충권 의원의 발언은,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아 공공의 신뢰를 훼손한 사례로 기록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퇴행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당 내부의 책임 메커니즘, 정치인의 윤리 기준, 언어 감수성 교육이 다시 정비되어야 한다.
지금 국회가 안고 있는 위기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 정치 전체의 구조적 병리다. ‘공산주의자’라는 한마디는 바로 그 병리의 가장 선명한 징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