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트렌드 기획⑤-3] ‘미래를 가공하는 기술’ 소재 생태계의 설계도

ESG 전환기, 공급망 재편기, 그리고 소재 전략의 좌표 이동

2025-04-05     박준식 기자
ESG 전환과 화학소재 산업: 이제는 환경과 기술이 하나의 축이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 고순도 화학소재는 더 이상 산업의 보조 동력이 아니다. 지정학적 긴장, ESG 규제, 기술 패권 경쟁이 맞물리는 현시점에서, 소재는 공급망을 넘어 ‘산업 생태계의 설계도’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소재는 수급과 정제, 가공의 문제를 넘어서 기술의 내재화와 글로벌 파트너십 구조를 어떻게 짜는지가 핵심이 되고 있다. 

ESG 전환과 화학소재 산업: 이제는 환경과 기술이 하나의 축이다

고순도 화학소재 산업은 전통적으로 환경과 충돌하는 영역이었다. 불산, 플루오르계 가스, 염소화 합성물 등은 모두 환경 독성, 인체 유해성, 규제 부담의 대상이 되는 물질군이다. 그러나 ESG 전환기에 들어선 지금, 이러한 소재들은 단지 오염원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한 기술 혁신의 출발점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과 유럽 화학물질청(ECHA)은 플루오르계 소재에 대한 생산 제한을 강화하고 있으며, 탄소배출 저감 기준이 기술 표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반도체 기업은 소재 공급자에게 배출지수, 순환가능성, 수명주기 평가(LCA)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기술기업들은 Cryo-etching, 저온식각 등 저탄소 공정기술을 지원하는 소재 개발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있다.

고순도 소재 산업은 정제·식각·증착의 기술 경로를 넘어, 이제는 환경 기준에 부합하는 ‘기술-윤리-규제 통합형 산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설계: 파편을 조립하는 ‘소재 파트너십’ 프레임

미국은 완결된 소재 생태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를 글로벌 파트너십 기반으로 재조립하려는 시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 연계: Linde, Air Liquide와 같은 글로벌 가스·화학소재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팹 근접형 생산기지’를 확대하고 있다.

▶공급망 리스크 시뮬레이션: 반도체 생산 공정 내 소재 병목을 수치화해, 우선 보완 항목에 대한 공공투자 우선순위를 설정한다.

▶기술 접근과 IP 확보: 유럽·한국·일본의 소재기업과 기술 라이선싱 및 공동 개발협약을 체결해, 지식 자산과 공급망 주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이 전략은 미국이 기술적 선도국이라기보다는, 공급망의 설계자(designer)로 기능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미국의 목표는 단순한 국산화가 아니라, 공급망 전체의 레이아웃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재조정하는 것이다.

한국 소재 산업의 전략적 과제: 고립된 경쟁력에서 구조적 위상으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 기술을 일부 품목에서 확보하고 있지만, 전략적 연계성과 협상력 측면에서는 아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다음 세 가지 과제가 핵심이다.

▶ESG 규제 대응 내재화: 해외 고객사 중심의 인증 대응을 넘어서, 한국 자체의 ESG 기준과 친환경 생산체계를 구축해야 글로벌 소재 동맹의 대등한 파트너로 기능할 수 있다.

▶기술 로드맵의 공유화: 대기업 중심의 수직계열화는 유리하지만, 중소·중견 소재기업이 생태계 내에서 지속가능한 포지션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 공동체 구성이 필요하다.

▶소재 IP의 전략적 운영: 단순한 생산기술이 아닌 조성비, 정제기술, 가공장비에 대한 핵심 특허군을 다층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기술 교섭력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기술을 가진 하청국’의 이미지였지만, 앞으로는 ‘기술을 기준으로 생태계를 조정하는 협상국’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한국이 설계할 수 있는 새 전략: 기술국가에서 생태계 국가로

전환기의 가장 큰 위험은 ‘정체된 경쟁력’이다. 한국 소재 산업은 지금까지 특정 품목에서의 초격차를 기반으로 외연을 확장해왔지만, 구조화된 산업 생태계 설계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대응이 부족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전략적 대전환이 필요하다.

국가소재전략청(가칭)과 같은 거버넌스 체계 설계

산업부·환경부·과기부의 분절적 대응을 넘어, 국가 차원의 기술-규제-산업 통합 전략기구 마련이 요구된다.

첨단소재 파운드리 개념의 도입

설계기술과 정제설비, 가공인프라를 통합해 소재 기업이 개별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설비 기반을 공공적 파운드리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미국-일본-유럽과의 공급망 공동 플랫폼 참여

단순 참여가 아니라, 일부 핵심소재의 공동 기준 제정 및 상호 인증체계 운영을 주도할 수 있는 기술국가로의 포지셔닝이 필수적이다.

 

소재는 ‘기술을 번역하는 언어’이자, 미래 산업의 구조다

소재는 단지 원료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을 실제로 구현하고, 공정을 가능케 하며, 산업의 구조를 좌우하는 기술 언어의 매개자다. ESG 전환기와 지정학의 중첩 속에서, 소재 전략은 이제 ‘무형의 리더십’을 의미하게 된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기술을 산업 전략으로 전환할 제도와 생태계 설계에 뒤처져 있다. 지금 필요한 건 기술이 아닌 구조화된 전략의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실행할 수 있는 산업 지휘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