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트렌드 기획①]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회화
허은선(HUH EUN SUN) 작가와 침묵의 층위
[KtN 임민정기자] 어떤 감정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색은 침묵을 입고 흐르고,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겹쳐진다. 허은선 작가의 회화는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감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침묵에 감각을 새기고, 시간의 여백에 감정을 매다는 행위다. 지금, 허은선 작가의 회화는 감각을 철학화하고, 존재를 조형화하며, K-회화의 흐름 위에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감각은 정지하지 않고 스며든다
허은선 작가의 화면 위에서 색은 흐른다. 그러나 그 흐름은 단지 물감의 중력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밀도이자 감정의 속도다. 색은 화면의 상단에서 시작되어 아래로 번지고, 점차 희미해지며 사라진다. 하지만 그 사라짐은 완전한 부재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는 감각의 전환이다.
이러한 흐름 위에 놓인 금박은 단단하지만, 빛에 따라 미세하게 진동한다. 침묵은 여기에 고정되지 않는다. 침묵은 금박을 타고 내려가고, 다시 여백을 가르며 존재의 조용한 지형을 형성한다. 안료의 유동성과 금의 고정성은 그 자체로 상반된 감각이지만, 허 작가는 이를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게 만든다. 서로 대립하면서도 침투하는 두 감각의 층위는, 감정과 기억이 머무르는 장소로 화면을 탈바꿈시킨다.
허은선 작가의 회화는 시작보다 훨씬 더 느린 기원의 언어다
《In the Beginning》 시리즈는 시작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기원’은 시간의 시점이 아니라 감각의 최초 출현이다. 감정이 형체를 갖기 이전, 기억이 언어로 고정되기 전,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상태의 떨림. 회화는 바로 그 전언不可能한 순간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다.
그림은 서사보다 깊고, 이미지보다 섬세한 시간을 드러낸다. 색이 남기는 궤적은 내면의 속도이고, 금박이 머무는 지점은 감각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리다. 허은선 작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정확하게 말한다. 색을 흘려보냄으로써 더 정확하게 붙든다. 회화는 이처럼 언어 이전의 감각, 혹은 언어 이후의 존재를 다루는 예술이 된다.
K-회화의 비물질적 전환, 그리고 그 한복판의 허은선 작가
지금 한국의 회화는 기술적 정교함이나 서사적 강도보다 더 앞선 차원에서 변화하고 있다. 감각의 구조, 비물질적 잔류, 시간성의 레이어, 존재의 인지 방식—이러한 요소들이 회화를 조용히 재구성하는 가운데, 허 작가의 작업은 그 구조적 전환의 가장 내밀한 중추에 닿아 있다.
허은선 작가는 색을 색 이상으로, 흐름을 구조 이상으로 다루고 있다. 안료의 번짐은 감각의 이동 경로이고, 금박은 존재의 지점을 상기시키는 기억의 은유다. 동양화의 여백과 흔적은 그의 손을 거쳐, 감정의 잔향과 침묵의 결로 환원된다. 회화는 더 이상 재현의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구조로서의 언어’가 된다. 그 구조는 말이 아닌 떨림으로 기억된다.
《The Sea in the Sky》, 침잠하는 기억의 깊이와 반사되는 감정의 표면
수평으로 펼쳐진 하늘과 수직으로 내려앉는 기억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교차한다. 《The Sea in the Sky – Remembrance》는 바다의 진폭과 하늘의 여백, 금박의 수직성과 블루의 흐름이 맞물리며 존재의 복잡한 심도를 구성한다.
기억은 수직으로 내려앉는다. 감정은 수평으로 퍼진다. 금박은 떨어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화면 위에 부유한다. 작가는 ‘Remembrance’를 단순한 회상이 아닌, ‘감각의 재구성’으로 제시한다. 잊힌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는 감정. 그것은 흐름과 멈춤, 사라짐과 잔존, 그리고 침묵과 진동이 동시에 중첩된 구조다.
이 회화는 말하지 않지만, 생각하게 만든다
허은선 작가의 작업은 결국 질문이다. 회화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것을 묻기 위해 존재한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존재는 어떻게 남는가?’, ‘감각은 어디에 스며드는가?’, ‘기억은 왜 고정되지 않는가?’
작가는 이 질문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색과 흐름, 여백과 금박의 진동을 통해 관람자가 그 질문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이는 해석을 요청하는 구조가 아니라, 감각을 일으키는 구조다.
허은선 작가의 회화는 조형적 형식의 완결성보다 감각의 구성력에 중심을 둔다. 시각적 연출보다 존재의 구조를 탐색하는 접근이 두드러진다. 감각은 하나의 언어로 기능하며, 회화는 그 언어를 통해 감정과 기억의 구조를 드러낸다. 현재 K-회화는 허 작가의 작업을 통해 감각 중심의 사유 구조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는 동시대 회화가 언어적 해석 너머의 층위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