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트렌드 기획②] 존재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허은선(HUH EUN SUN) 작가의 《In the Beginning》, 감각 구조로서의 회화
[KtN 임민정기자] 존재는 보이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감각은 말보다 먼저 도착하고, 감정은 흔적으로 남는다. 허은선 작가의 《In the Beginning》 시리즈는 회화가 형상을 묘사하기 이전, 존재가 감각으로 나타나던 시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구조이고, 기법이 아니라 진동이다. 지금, K-회화는 감각의 기원을 사유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문법을 형성하고 있다.
시간의 앞이 아니라, 감각의 가장 깊은 자리
《In the Beginning》이라는 제목은 기원의 서사처럼 보이지만, 허은선 작가가 주목하는 ‘시작’은 특정한 시간의 지점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이 최초로 작동하고, 존재가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지각의 첫 떨림에 가깝다. 회화는 이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구성한다.
푸른 안료는 화면 위를 수직으로 흐르며 감정의 중력을 따라 내려오고, 흐름은 점차 옅어지며 여백 속으로 스며든다. 이때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백색의 밀도 속에서 다시 변형된다. 금박은 이 흐름 위에 고정된 구조를 남긴다. 그것은 감정의 표면이 아니라, 시간의 깊이를 가시화하는 시각적 이정표다.
감각은 형태가 되기 이전에 구조를 이룬다
허은선 작가는 감각을 단순히 표현하지 않는다. 감각은 허 작가의 회화에서 구조로 작동한다. 흐름, 속도, 밀도, 중력—이 모든 비가시적 조건들이 화면 위에서 조형적으로 조직된다. 이는 회화를 다시 감각의 지도, 혹은 감정의 운동 구조로 재정의하는 시도다.
《In the Beginning》은 형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관람자는 색의 흐름과 금박의 배치를 따라 감각의 리듬을 읽게 된다. 시선은 화면의 상단에서 하단으로, 흐림에서 명료함으로 이동하지만, 그 끝에는 어떤 확정도 도달하지 않는다. 감각은 닫히지 않은 상태로 남고, 회화는 그 미완의 구조를 고정한다.
K-회화는 서사가 아닌 감각으로 재편되고 있다
허은선 작가의 작업은 지금 K-회화가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의 한국 회화는 양식적 실험에서 철학적 사유로 넘어가고 있으며, 감각과 존재, 시간성과 기억이라는 비물질적 주제가 조형의 중심에 놓이고 있다.
허 작가는 이 새로운 구조를 단순히 시각적 양식으로 수용하지 않고, 회화 내부의 언어 구조를 바꾸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색의 흐름은 감정의 흐름이고, 금박의 잔류는 시간의 표식이다. 여백은 멈춤이 아니라 감각의 지연이며, 사라짐은 부재가 아닌 다른 방식의 현존이다.
회화는 감각을 생성하는 구조여야 한다
《In the Beginning》 시리즈는 감각을 재현하지 않는다. 회화 자체가 감각을 일으키는 구조로 작동하도록 설계된다. 이때 화면은 더 이상 하나의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 감정의 진동과 기억의 결이 겹쳐지는 시공간적 장소가 된다.
감상자는 색이 흐르는 방향과 속도, 금박의 정지 상태, 그리고 여백의 밀도 사이에서 각자의 감각 구조를 재구성하게 된다. 이는 감상 경험을 해석 중심에서 감각 중심으로 이동시키며, 회화를 하나의 ‘감각적 매체’로 다시 정의하게 만든다.
존재의 기원을 묻는 방식, 회화의 언어를 바꾸다
허은선 작가는 존재를 물리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존재는 작가의 회화에서 ‘흔적의 구성’으로 나타난다. 《In the Beginning》은 바로 이 존재의 시작을 시각화하려는 시도이며, 감각이 어떻게 시공간 위에 남겨지고 전이되는지를 보여준다.
금박은 감각의 이정표가 되고, 색의 흐름은 감정의 속도가 된다. 여백은 그 모든 흐름이 머무는 장이며, 관람자는 그 장 안에서 감각의 파편과 기억의 조각을 감지하게 된다. 회화는 더 이상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을 구조화하는 장치로 전환된다.
《In the Beginning》 시리즈는 허은선 작가가 그리는 감각 구조의 기원에 대한 정교한 시각적 해석이다. 작가는 색의 흐름과 금박의 질서를 통해 존재의 흔적을 조형하며, 회화가 단순한 이미지 생산이 아니라 감각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지금, K-회화는 다시 감각으로 말하고 있다. 허 작가의 조용한 화면은 그 새로운 문법의 시작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