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케이팝의 음원 차트 이탈, K-드라마의 플랫폼 선점: 동남아시아 K콘텐츠 소비 구조의 이중 분화
[글로벌 K-컬처 트렌드] 2025년 3~4월 말레이시아 현황 분석
[KtN 임우경기자] 2025년 3월과 4월, 동남아시아 문화 소비의 관문인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 대중문화의 ‘채널별 소비 격차’가 분명히 드러났다. 동일한 ‘K-콘텐츠’라는 기표 아래 묶이지만, 케이팝 음원은 현지 소비시장에서 주변부로 밀려났고, K-드라마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중심으로 중심성과 파급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전통적인 팬덤의 결속력에 의존해온 케이팝과, 내러티브 기반 감정이입 전략을 재정비한 K-드라마 간의 운신 차이는, 단순한 인기의 부침이 아니라 구조적 소비 양상의 분기점으로 읽힌다.
말레이시아 아이튠즈 음원 차트에서 배제된 케이팝: 글로벌 팬덤 모델의 균열
2025년 4월 1일 기준, 말레이시아 아이튠즈 톱 송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는 하리라야 시즌을 맞아 발표된 지역 아티스트들의 신곡으로 채워졌다. Mimifly의 ‘Serumpun’, Hael Husaini와 Nadeera의 ‘Meriah Lain Macam’ 등 말레이 음악은 지역의 종교적·문화적 정서를 정밀하게 포착하며 청중과 호흡하고 있다.
반면, 케이팝은 상위권에 단 한 곡도 진입하지 못했다. BTS 제이홉의 ‘MONA LISA’는 27위,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 범규의 ‘Panic’은 37위, 에스파의 ‘Whiplash’는 39위에 머물렀다. 빅히트 뮤직 소속 제이홉은 루브르 박물관 공식 SNS 계정과의 교류를 유도하며 글로벌 팬덤을 겨냥했지만, 말레이시아 청취자의 일상적 감성이나 음악적 취향과는 교차하지 못했다. 프랑스 중심의 예술 담론을 내세운 전략은 오히려 동남아 시장에선 ‘낯선 정서’로 수렴된 셈이다.
범규가 발표한 ‘Panic’은 러시아와 일본 등 11개국에서 아이튠즈 톱 송 1위를 차지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그 성과가 재현되지 않았다. 국가별 차트 구조의 이질성은 ‘글로벌 차트 진입’이라는 전통적 K-POP 전략의 유효성이 점차 축소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튜브 조회수 1억을 넘기고 영어 버전까지 공개한 에스파의 ‘Whiplash’ 역시 소비 주체로서 말레이 청중의 선호 범위 밖에 있었다.
아이튠즈 차트 상위권이 로컬 정서 중심의 곡들로 채워졌다는 점은, 단순한 인기 경쟁이 아닌 ‘정서적 공명력’에 대한 K-POP 전략의 재조정 필요성을 시사한다.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의 포괄적 확산이 아니라, 로컬 문화 코드에 대한 해석과 반영이 경쟁력의 관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드래곤의 ‘COUP D’ETAT’, 시간의 벽을 넘은 브랜드 파워
음원 시장과 달리, 앨범 차트에서는 오래된 앨범이 이례적으로 순위를 역주행하며 주목을 받았다. 지드래곤의 정규 2집 <COUP D’ETAT>가 말레이시아 아이튠즈 톱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했다. 2013년 발매된 이 앨범은, 2025년 2월 11년 만에 발표된 3집 <Übermensch>와 그에 이은 월드투어 일정 발표로 인해 재조명되고 있다.
지드래곤이라는 브랜드는 단순한 팬덤 동원력을 넘어, 오랜 시간 축적된 ‘예술성과 아우라’로 현지 소비자에게 다시 인식되었다. 이는 K-POP 소비가 단기 트렌드가 아닌 ‘시간을 통과한 정체성’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트레저, 에이티즈, NCT DREAM 등 대형 소속사 소속 그룹들의 앨범은 중하위권에 분산되어 있으며, 일부는 팬덤 중심의 구매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반복적 소비’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정체성과 콘셉트가 반복되는 프로덕션 구조는 말레이시아와 같은 혼합문화권 시장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말레이시아 넷플릭스 상위권 K-드라마: ‘정서와 포맷’의 이중 타깃 전략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3월 31일 기준 말레이시아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1위는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약한영웅 Class 1>이다. 네이버 웹툰 원작에 기반한 이 드라마는 폭력과 저항이라는 서사를 통해 말레이시아 젊은 시청자층의 정서와 맞닿았으며, 2022년 방영 당시의 파급력보다 훨씬 강한 반향을 현재 이끌어내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와 <나 혼자만 레벨업> 역시 상위권에 안착했다. 특히 <폭싹 속았수다>는 모든 회차를 한꺼번에 공개하지 않고 매주 금요일마다 4편씩 선보이는 방식으로 콘텐츠에 대한 ‘기대의 리듬’을 형성하며, SNS를 중심으로 몰입형 시청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새로 설치했다”, “금요일이 기다려진다”는 말레이시아 사용자 반응은 단순한 인기 이상의 ‘라이프스타일적 침투’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성과는 단지 배우의 연기력이나 서사 완성도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현지 소비자들이 콘텐츠를 시청하고 공유하며, 그 감정을 커뮤니티 내에서 순환시키는 구조가 넷플릭스 플랫폼 내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K-드라마를 단순히 시청하는 대상이 아닌, 관계 형성의 매개로 변화시키고 있다.
스크린 속으로 확장된 K콘텐츠: 공연과 리메이크, 그리고 SF
말레이시아 극장가에서도 한국 콘텐츠의 포맷 다양화가 감지된다. 세븐틴의 공연 실황 영화 <RIGHT HERE WORLD TOUR IN CINEMAS>는 콘서트를 극장 공간으로 옮겨 공연 관람 경험을 극대화한 시도로, 팬덤 중심 콘텐츠의 새로운 유통 방식으로 주목된다.
조영명 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대만 원작의 정서를 보존하면서 한국식 정서로 재해석한 리메이크 작품으로, 동남아 시장 내 감성 콘텐츠의 호환성을 실험한 첫 사례로 의미를 갖는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기술적 완성도와 장르적 몰입을 겸비한 SF 영화로,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K시네마의 확장 가능성을 증명했다.
‘글로벌 확장’이 아닌 ‘정서적 접촉면’의 구축이 관건
2025년 봄, 말레이시아 콘텐츠 시장에서 케이팝과 K-드라마가 보여준 성적은 한국 대중문화 전략에 중대한 함의를 던진다. K-드라마는 플랫폼 친화적 제작 전략, 감정의 보편성, 정서적 응집력이라는 삼중 구조를 통해 현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반면, 케이팝은 글로벌 팬덤 기반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기대고 있으나, 지역 정서와 청취 패턴을 포착하는 전략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말레이시아 차트가 보여준 변화는 단순한 인기 순위의 변화가 아니라, 글로벌 문화 전략이 이제는 ‘정서적 밀착도’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이자 기회다. 한국 콘텐츠 산업이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포맷과 소비 구조의 재고, 로컬 정서와 플랫폼 생태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그리고 창작과 유통을 통합하는 전략적 조율이 필수적이다. 케이팝이 다시 상위 차트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팬덤 동원이나 다국어 버전 공개를 넘어, 음악적 메시지와 감정의 진폭이 지역 문화권과 호흡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