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트렌드] OTB 가격 인상 시사, 고급화 전략인가 위기 포장인가

공급망 리스크, 고급 브랜드도 구조적 취약성에 노출되다

2025-05-07     박준식 기자
우발도 미넬리(Ubaldo Minelli) 사진=OTB 홈페이지 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 이탈리아 패션 그룹 OTB가 가격 인상을 검토 중이라는 발언이 공개되면서, 고급 패션 브랜드의 ‘가격 전략’이 다시 한 번 산업·정치의 경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마르지엘라, 디젤, 마르니, 질샌더 등 글로벌 하이엔드 브랜드를 거느린 OTB는, 미국발 고율 관세 조치에 대응해 미국 내 가격을 전 브랜드 평균 8~9% 인상할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가격 조정이 아닌, 이 움직임이 어떤 경제적 진실과 전략적 긴장을 감추고 있는가에 있다.

가격 인상의 정치적 맥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중국산 제품에 대한 145% 관세 부과 조치는 단순한 무역 전쟁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자체를 압박하는 전략적 조치로 작동하고 있다. 특히 패션 산업은 부자재, 원단, 포장재 등 다수의 세부 공정에서 중국과 연결돼 있어, 생산지가 유럽이라 하더라도 실질적 영향권을 벗어나기 어렵다.

OTB의 우발도 미넬리(Ubaldo Minelli) CEO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브랜드별로 시뮬레이션을 진행 중이며, 관세가 실제로 부과될 경우 수익성 유지를 위해 미국 내 가격을 그룹 전체적으로 8~9% 인상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이 발언이 단순히 “비용 전가”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넬리는 ‘가격 포지셔닝 재조정’이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며, 가격 인상을 이윤 극대화의 전략으로 명확히 규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브랜드별 시뮬레이션”이라는 표현을 통해, 가격 조정이 단일 브랜드가 아닌 그룹 차원의 구조적 대응 전략임을 시사했다.

OTB의 움직임을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등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들의 전략에 '단순히 편승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프랑스 브랜드들은 명시적으로 “미국 소비자에게 관세 인상분을 전가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OTB는 가격 조정의 당위성과 방향을 보다 복합적으로 탐색 중인 단계이며, ‘위기 대응’과 ‘브랜드 전략’ 사이에서의 균형점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브랜드 가치 재정의, 소비자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가격 인상이 브랜드 가치 상승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특히 MZ세대 중심의 소비자는 단지 비싸다는 이유로 브랜드에 매료되지 않는다. 사회적 메시지, 환경 지속가능성, 윤리적 제조방식 등이 브랜드 평가의 주요 기준이 된 시대에, 가격은 더 이상 브랜드 정체성의 중심 축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OTB가 추진 중인 가격 조정 시뮬레이션은 그 자체로 '가치-가격 간 불균형'에 대한 소비자 감각을 시험하는 리스크 요소가 된다. 브랜드는 가격 인상을 통해 위기를 넘기려 하지만, 소비자는 그 인상을 ‘전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방어적 포장’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기존 소비자층이 아닌 새로운 시장과의 관계에서, 가격의 상향 조정은 브랜드 신뢰도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무기로서의 관세.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공급망 리스크, 고급 브랜드도 구조적 취약성에 노출되다

OTB의 고민은 단지 가격 조정에 있지 않다. 이번 관세 위기는 명품 브랜드조차 글로벌 공급망의 구조적 불안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전통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실제 생산 구조는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과 글로벌 조달 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다. 이 복잡한 연결망은 국가 간 정치 변화에 즉각적으로 노출되며, 고급 브랜드도 더 이상 이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국 패션 산업에 주는 구조적 시사점

OTB의 전략적 고민은 한국 패션 산업에 중요한 거울을 제공한다. 한국은 여전히 OEM 기반의 수출 중심 구조에 머물러 있으며, 브랜드 중심의 가치 전략보다 가격 경쟁력에 의존해왔다. 특히 중간 가격대 브랜드의 해외 진출 전략은 글로벌 고급화 흐름 속에서 가격 포지셔닝의 애매함으로 인해 구조적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무엇보다 K-패션은 위기 대응 방식에서 ‘공급망 리스크’에 대한 내성이 부족하다. 단순한 제품 경쟁력이나 디자인만으로는 고급 소비자층의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고, ESG 경영과 브랜드의 감정 자본 관리가 전면화되는 흐름에 뒤처져 있다. 이제는 생산기지 다변화, 리스크 대응 시뮬레이션, 글로벌 통상 환경 변화에 대한 선제적 정보 대응이 브랜드 전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명품의 탈을 쓴 구조적 위기

OTB의 가격 인상 시사는 단순한 가격 조정이 아니다. 명품 브랜드가 외부 리스크를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그러나 명분은 점점 더 허약해지고 있으며, 소비자는 허상을 빠르게 간파하고 있다. 가격은 브랜드의 생존 수단이 아닌,  취약성을 은폐하는 방어막이 되어가고 있다.

럭셔리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산업 구조의 모순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격 인상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정직한 고백과 전략적 갱신이다. 한국 패션 산업이 진정한 ‘글로벌 플레이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브랜드’보다 ‘구조’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