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트렌드④] ‘법’ 앞의 불평등: 파산·회생 실무 개선과 사법 인프라의 현실
법률이 보장하지 않는 정의
[KtN 최기형기자] 채무자 회생제도는 ‘재기’와 ‘면책’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지만, 현실의 법원은 여전히 불균형한 절차와 구조적 장벽으로 채무자에게 냉혹한 공간이다. 서울회생법원을 제외하면 다수의 지방법원은 회생·파산 사건을 비전문부서가 겸임 처리하고 있으며, 사건 처리 속도는 느리고 기준은 불명확하다. 채무자의 상황은 제도보다 앞서 무너지고, 법적 구제는 그 뒤를 따라오지 못하는 구조다.
‘법 앞의 평등’은 존재하지만, ‘실행 앞의 불평등’은 더 강력하게 존재한다. 법이 허용한 권리가 절차적 벽에 가로막힐 때, 실질적 권리는 부정된다.
‘직권주의’가 초래한 실무 병목
현행 파산제도는 채권자의 이의가 없더라도 법원이 직권으로 면책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이른바 ‘직권주의’는 법원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절차의 지연을 일상화시킨다. 파산자와 채권자 간의 실질적 대립이 없는 사건조차 지체되며, 구제의 시의성은 사라진다.
대심구조로의 전환, 즉 법원이 실질적인 분쟁이 있을 때만 개입하고 그 외에는 절차의 자동화와 간소화를 꾀하는 개선책이 요구되고 있으나, 사법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실무의 효율성과 사회적 정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법원은 선택을 유보해왔다.
폐지 기준의 기계화, 회생의 기회를 박탈하다
현행 회생 실무에서 ‘3개월 이상 변제 지체’는 자동 폐지 절차의 기점이 된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지연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 기준은, 경기침체나 일시적 실직과 같은 외부 요인에 취약한 채무자에게 회생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는다.
서울회생법원은 30세 미만 청년에게 3년 미만의 초단기 변제계획을 허용하고 있으나, 이 역시 실무준칙일 뿐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회생은 살아 있는 제도지만, 현실에서는 죽은 규칙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생계 보장 없는 면책, 재기의 조건은 부재하다
현행 법률은 면제재산의 범위를 협소하게 설정하고 있다. 임차보증금, 생업 수단, 교육비나 의료비는 면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만 인정된다. 법률은 생존을 허용하되, 재기를 위한 기반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 결과, 회생이나 파산을 통과한 채무자들이 다시 재도산하거나 불안정 노동으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된다. 파산은 법적 종료이지만, 사회적 추락은 계속되는 것이다. 회생을 허용하고도 재도산을 방치하는 구조는 단지 불완전한 법이 아니라, 기능을 포기한 사법체계다.
전국 법원의 격차, 구제의 지리적 불평등
서울회생법원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선진적인 판례와 실무준칙을 내고 있지만, 지방 법원은 여전히 인력 부족과 업무 과중 속에 있다. 회생 전문 재판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지역도 있으며, 파산관재인·회생위원 역시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제도의 형식이 존재하더라도, 접근 가능한 기관이 없으면 그 제도는 허상이다. 채무자의 주소에 따라 구제의 수준이 달라지는 현실은,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는 구조적 불평등이다.
정보의 비대칭, 제도 접근성의 불평등
한계 채무자일수록 제도에 대한 접근성이 낮고, 그 존재조차 모른 채 불법사채와 추심의 고통 속에 방치된다. 그러나 법원은 회생·파산 절차를 스스로 신청하라는 방식으로 일관하며, 제도 고지를 ‘당사자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회생보다 파산이 현실적인 선택임에도, 안정적 소득 요건에 묶여 회생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있다. 법원은 오히려 제도 활용의 문턱을 높이고, 채무자의 현실을 추정하지 않는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그 문은 닫혀 있다.
사법 개혁은 법원의 태도 변화부터 시작돼야 한다
법원은 더 이상 중립적인 절차 운영 기관으로 머물 수 없다. 가계부채의 위기 속에서 파산·회생 제도는 사회안전망의 실질적 출발점이며, 사법부는 그 입구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실무 기준의 완화, 생계기반 보장의 제도화, 정보 고지 의무의 강화, 인프라 확충은 지금 당장 시작돼야 할 과제다.
사법부가 침묵하면, 채무자의 침묵은 고통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침묵은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