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트렌드③] 유예된 개혁, 반복된 침묵: 법원과 국회의 공모 구조
법조일원화 퇴행과 대법관 구조 고착
[KtN 최기형기자]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조희대 대법원장의 정치 편향 판결 논란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이례적 처리 방식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지만, 법원 내부의 다수는 논의 자체를 회피하거나 침묵했다. 이는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8년간 반복되어온 사법개혁 좌절의 구조적 역사를 반영한다. 조희대 체제가 보여준 ‘사법의 정치화’는 예외가 아니라, 개혁 불가능한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었다.
양승태 사법농단 이후, 사법개혁은 국민적 요구로 부상했다. 법원행정처 권한 축소,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 사법행정의 민주화, 법조일원화 강화 등 주요 과제들은 학계와 시민사회, 소수 법관들의 연대로 공론화됐고, 국회와 대법원에 이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어떤 과제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법조일원화 퇴행과 대법관 구조 고착
2024년, 국회는 법관 임용을 위한 최소 경력을 절반으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이루어진 입법으로, 기존의 법조일원화 제도를 사실상 폐기한 결정이었다. 법조일원화는 다양한 법조 경력을 가진 인물을 법관으로 선발해 폐쇄적인 법원 문화와 엘리트 편향을 완화하자는 제도였지만, 국회는 이를 졸속 논의 끝에 무력화했다.
당시 다수 법학교수와 시민단체가 “사법개혁의 역사적 퇴행”이라고 지적했지만, 정치권은 침묵했고 법원은 이에 동조했다. 특히 대법관 구성에 있어 서울대-사법연수원-행정부 경험이라는 기득권 삼각구조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으며, 전원합의체 구성 역시 이러한 구조적 편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법원은 대법관 증원을 주장하며 인력 문제로 개혁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증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구성의 다양성과 권한의 분산이다. 현재와 같은 중앙집중적 구조에서는 대법관 수가 늘어나더라도 소수 권력에 의한 판단 집중은 반복된다.
법원행정처, 개혁 대상에서 복원 기구로
법원행정처는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 기구였다. 그러나 2020년대 중반 들어 행정처는 다시 대법원장의 ‘사법 통치’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전원합의체 회부와 재판 일정 조정, 내부 의견 수렴까지 행정처를 통한 수직적 조율이 강화되었고, 이는 법원 내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의 왜곡을 초래했다.
법원행정처를 합의제 행정기구로 전환하거나 외부 감시 장치를 도입하자는 제안은 반복되었지만, 실제 입법이나 제도화는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는 행정처 개혁을 외면했고, 법원은 기득권 유지에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행정처는 폐지 대상이 아니라 복원된 사법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개혁은 없고, 책임도 없다
사법개혁의 좌절은 책임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반복되었다. 사법농단 이후 8년 동안, 누구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고, 구조도 변하지 않았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선고 일정과 판결 방향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음에도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내부 다수의 반대 속에 침묵을 선택했다. 국회는 특검, 청문회, 탄핵이라는 정치적 레토릭을 반복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구조 진단이나 제도 개편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와 사법의 공모는 공식적인 연대가 아니라, 개혁을 회피하는 무언의 공감대에서 발생한다. 법원이 침묵할 때 국회는 개입하지 않고, 국회가 방조할 때 법원은 구조를 재생산한다. 이 순환은 구조를 바꾸려는 의지를 누락시킨 채, 책임을 전가하며 위기를 반복해왔다.
한 시민사회 관계자는 “사법개혁은 실패한 적이 없다. 단지 시도된 적이 없을 뿐”이라며, 제도 설계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법개혁이 구호로만 머물고, 판결은 정치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지금, 국민은 사법을 더 이상 헌법적 기관으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
제도화 없는 사법개혁은 없다
조희대 체제는 사법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전국법관대표회의의 무력함, 대법원장의 결정 집중 구조, 법원행정처의 복원, 국회의 졸속 입법은 모두 연결된 고리다. 사법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선언이 아니라 구조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첫 단추는 구체적 제도 개혁과 입법 실현이다.
더 이상 ‘개혁을 위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헌법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의 재설계이며, 그 실현을 위한 입법과 실천이다. 이제 사법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유지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