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트렌드] SK하이닉스 기술 유출 사건이 드러낸 한국 반도체 보안의 취약지대
[KtN 박준식기자] SK하이닉스의 핵심 기술이 중국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에 유출된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CIS(CMOS Image Sensor) 및 HBM(High Bandwidth Memory) 구현에 필수적인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까지 포함된 이번 기술 유출은 단순한 산업기밀 침해를 넘어, 국가 전략기술 보안체계 전반에 대한 경고 신호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기술’ 유출 아닌, ‘산업권력’ 유출
서울중앙지검 정보기술범죄수사부가 구속 기소한 전 SK하이닉스 직원 김모 씨는, 중국 현지법인에 근무하던 중 하이실리콘의 이직 제안을 받고 사내 문서관리시스템에서 대외비 자료를 무단 출력하거나 촬영하는 방식으로 약 1만1,000여 장에 달하는 기술자료를 유출했다. 특히 김 씨는 자료 속 ‘대외비’ 표기와 기업 로고를 삭제해 유출 사실을 은폐하려 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김 씨가 유출한 기술은 단순한 제품 설계도나 공정서가 아니다. 차세대 반도체 칩 제조에 필요한 초미세 공정기술, 고대역폭메모리 구현을 위한 패키징 기반기술, 그리고 인공지능 반도체의 상용화에 필요한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이 포괄돼 있었다. 이는 한국 반도체 기술력의 정수이자, 시장 경쟁력 그 자체다.
중국 하이실리콘은 미국의 수출 규제 이후 독자적 반도체 역량을 키우려는 시도를 이어왔고, 이직 과정에서 해당 기술이 유출될 경우 이미지 센서 및 HBM 분야의 기술격차를 급격히 좁힐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 컸다. 이번 사건은 기술 유출이 곧 산업 권력의 재편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줬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해외 보안공백, 구조적 문제인가
김 씨의 범행은 SK하이닉스 내부 감사 과정에서 적발됐다. 회사 측은 USB 등 저장장치 차단, 출력물 통제, 정기 감사 등 다양한 보안장치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해외 법인에 대한 동일한 수준의 보안조치는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보안시스템이 아닌 조직의 ‘균열’에서 기술이 빠져나간 셈이다.
대기업의 해외법인은 현지 실무자 주도의 ‘로컬 운영’이라는 미명 하에 본사의 보안통제권에서 느슨하게 벗어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김 씨가 활동한 중국 현지법인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시스템은 존재했지만, 감시는 미약했고, 리스크는 예견된 수준을 넘어섰다.
기술 유출이 최초 적발된 시점은 2022년이었고, 김 씨는 3년 만에 구속기소됐다. 이 지연의 시간 동안 기술 자료는 수만 장 규모로 복제됐고, 일부는 하이실리콘 및 중국 기업에 실제로 전달됐다. 다행히 유출 기술이 실제 제품에 적용되었다는 증거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잠재적 피해 규모는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HBM과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 가치의 ‘전략 자산화’ 필요
유출된 기술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이다. 이는 단순한 접합 기술이 아닌, 차세대 메모리 및 연산칩의 적층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공정이다. 미국, 일본, 대만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이 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분류하고, 수출통제와 내재화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한국도 2024년부터 HBM 및 첨단 패키징 기술을 산업기술보호법상 ‘전략 기술’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지만, 실효성은 여전히 미비하다. 물리적 보안 시스템, 법적 규제, 인적 통제 체계 간의 불균형이 존재하며, 김 씨와 같은 사례는 그 균열을 여실히 드러냈다.
기술의 ‘전략 자산화’가 시급하다. 단순히 기술 보호의 개념을 넘어, 반도체 기술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국가 전략의 일부로 끌어올려야 한다. 특히 하이브리드 본딩은 HBM뿐 아니라 3D NAND, SoIC(시스템 온 인터커넥트) 등 차세대 반도체 플랫폼의 근간이 되기 때문에, 해당 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산업 생태계의 구조 자체를 재편할 수 있다.
중국의 ‘기술 수입’ 전략, 고도화 단계로 진입
주목할 점은 하이실리콘의 전략이다. 미국의 제재 이후, 자체 칩 설계 및 생산역량 확보를 위해 해외 기술인력의 영입과 유출 기술 확보에 집중해왔다. 직접적인 공급망 확보가 어려워지자, 인적 자산을 활용한 ‘기술 내재화’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김 씨 사건은 이 같은 흐름의 일환이다. 단순한 스파이 행위가 아니라, 구조적 산업 전략과 연결된 ‘기술 이민’의 정치경제적 형태다. SK하이닉스 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중국과 한국 사이의 기술 주도권 경쟁이 더 복잡하고 정교한 국면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신호다.
기술 보안의 ‘관념’에서 ‘지정학’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이 당면한 도전은 단순한 보안 체계의 미비가 아니다. 지정학적 경쟁구도 속에서, 반도체 기술은 더 이상 기업 자산이 아닌 ‘국가 전략 자원’이다. 따라서 기술 유출은 산업 보안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안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SK하이닉스 사건은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기술은 보호하면 된다’는 관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기술 유출은 이직과 채용, 기업 간 전략과 국가 간 통상 문제까지 얽힌 복합적인 지형에서 발생한다. 법적 대응과 보안 강화는 이제 출발선에 불과하다.
기술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기술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묻는 일은, 더 이상 단순한 내부 감사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차원의 전략적 기술 주권, 그리고 산업 보안 체계의 전면 재정비가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