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Insight③] 생산 없는 창의성: 기획은 넘치고, 팔 수는 없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구조, 왜 바뀌지 않는가

2025-05-29     임우경 기자
[KtN 기획] 꽃, 몸, 이미지의 제국: 미스 소희, 구조를 설계한 디자이너. 사진=YELIM PUBLISH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 2024년 기준, 국내 디자이너패션 브랜드는 평균 98.2개의 SKU(기획 단위)를 제작한다. 이는 연간 약 100가지 아이템을 기획하고 생산한다는 의미이며, 패스트패션 수준의 기획량과 맞먹는 수치다. 그러나 판매율은 평균 60.8%에 불과하다. 절반 가까운 제품이 제값을 받지 못한 채 남게 된다.

디자이너 브랜드는 실험성과 창의성을 내세우지만, 시장은 그만큼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의 전략이 리스크로 전환되며, 브랜드는 재고 처리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할인 판매로 전환되는 재고 비율은 85.7%에 달하며, 소각률도 2.3%에 이른다.

창의성은 재고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에서만 유지된다

생산과 재고 문제는 단순히 사업 운영의 어려움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창의성과 정체성이 유지될 수 없는 구조적 배경이다. 기획이 곧 매출로 전환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디자이너는 점차 무난한 상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실험적인 기획은 내부에서 자체 검열된다.

즉, 생산단에서 이미 창의성은 후퇴한다. 시그니처 라인보다 기본 아이템을 늘리고, 도전적 소재보다는 검증된 소재를 반복 사용하며, 트렌드보다 반응 중심의 기획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브랜드의 고유 미학과 언어가 사라지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생산을 책임지는 주체는 누구인가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디자이너 브랜드의 97.6%가 직접 기획과 생산을 병행한다. 그러나 생산 공정의 대부분은 외주 형태로 운영되며, 자체 봉제시설을 보유한 브랜드는 드물다.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과 ODM(제조자개발생산) 형태에 의존하면서도, 생산 리스크는 전적으로 브랜드가 감당한다.

소량생산 구조에서 납기 지연, 품질 불일치, 원단 수급 불안정은 상시적 문제이며, 생산 파트너와의 협상력도 약하다. 일부 디자이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규모 협업공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다른 브랜드와 공동 생산라인을 운영하고 있으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브랜드는 생산의 주체가 아닌 생산 리스크의 수용자가 된다.

기획과 생산을 잇는 시스템이 부재하다

현행 디자이너패션산업은 생산 프로세스와 기획·유통이 유기적으로 연동되지 않는 구조다. 기획이 생산으로 이어지고, 생산이 유통과 수요예측에 연계되어야 하지만, 이 사이의 데이터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랫폼은 판매 데이터를 갖고 있고, 생산업체는 납기 정보를 갖고 있지만, 디자이너는 양쪽 모두를 실시간으로 확보하지 못한다.

특히 브랜드 규모가 작을수록 이 불균형은 심화된다. 의사결정은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기획 과잉과 재고 리스크를 반복적으로 유발한다. 창의성의 문제는 단지 아이디어의 고갈이 아니라, 시스템 부재의 구조적 문제다.

정책은 있지만, 인프라는 없다

디자이너 브랜드를 위한 지원 정책 중 다수가 ‘생산 지원’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는 바우처 지급이나 단기 사업 연계에 그친다. 정작 필요한 것은 공동 봉제 인프라, 적정 생산 파트너와의 매칭, 수요 기반 기획 가이드 시스템 등 장기적 구조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는 독창적 디자인보다 생산 품질과 납기 안정성을 갖춘 브랜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디자이너 브랜드는 생산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곧 수출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창의성을 상품으로 만들 수 없는 산업은 결코 문화산업이라 불릴 수 없다.

창의성이 구조로 구현되는 산업

디자이너패션은 창의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는 기획을 과잉하게 만들고, 생산을 불안정하게 하며, 재고를 감당하지 못하게 만든다. 창의성은 아이디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유통, 수요와 연결되어야만 ‘상품’이 된다.

2025년 현재, 한국 디자이너패션산업은 이 연결 고리가 없다. 기획은 넘치지만, 시장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며, 생산은 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창의성을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 다시 말해 생산에서 기획을 보호할 수 있는 산업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