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Insight] 밀러놀 아카이브 개방, 디자인 산업의 문화 자산화와 그 이면

공공화된 아카이브, 디자인 유산의 제도화 흐름을 가시화하다

2025-06-08     임민정 기자
사진=MillerKnoll / Willem van Hooff,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 2025년 여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밀러놀(MillerKnoll)의 본사 ‘디자인 야드(Design Yard)’에 1,200평방미터 규모의 상설 아카이브가 문을 연다. 밀러놀 아카이브는 허먼 밀러(Herman Miller)와 놀(Knoll)을 포함한 브랜드의 역사적 디자인 100만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으며,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상징적 유산을 ‘열람 가능한 구조’로 조직한 첫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시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Manufacturing Modern' 섹션은 플로렌스 놀, 조지 넬슨, 찰스 & 레이 임스, 에로 사리넨 등 주요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통해 미국형 모더니즘이 어떻게 제도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Open Storage' 공간은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가구 디자인 흐름을 실물 중심으로 구성했으며, 초기 프로토타입과 전시품이 시계열로 배치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Reading Room'은 기술 도면, 개발 문서, 마케팅 아카이브 등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디자인 산업 아카이브의 전형 제시

밀러놀 아카이브는 브랜드 정체성과 디자인 문화의 보존, 공공화를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는 전략적 구조로 볼 수 있다. 전시 공간은 단순한 쇼룸을 넘어서 디자인 유산을 산업적 자산이 아닌 ‘문화적 공공재’로 재규정한다. 플로렌스 놀의 사무용 가구, 임스 부부의 사진, 조지 넬슨의 광고 등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제작과 사용의 맥락’ 속에서 재배치된다. 이는 기존 디자인 전시가 조형성과 작가주의에 치중한 반면, 밀러놀 아카이브는 ‘생산과 흐름’이라는 산업의 구조적 측면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또한, 다브랜드 구조를 갖춘 밀러놀 그룹의 특성상 아카이브는 개별 브랜드를 넘는 ‘디자인 생태계’의 조직도로 기능한다. HAY, Geiger, NaughtOne 등 동시대 브랜드의 전시물 역시 같은 공간에 배치되며, 브랜드 간 상호 참조가 가능해진다. 이는 디자인 아카이브가 ‘시장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MillerKnoll / Willem van Hooff,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폐쇄적 운영 방식과 정보 접근성의 비대칭

밀러놀 아카이브는 공공에 개방된다고 명시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제한된 시기와 사전예약 기반 투어에 한정된다. 이는 디지털 접근성과 지속적인 활용이 핵심인 현대적 아카이브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웹 기반의 메타데이터 검색, 온라인 큐레이션 서비스, 디지털 복제자료 등과 같은 확장 서비스가 부재한 점은 아카이브의 ‘지식 자원화’라는 측면에서 명확한 한계로 작용한다.

또한, 아카이브가 개방된 목적과 구성이 브랜드 내부 서사의 확장에 머무는 한, 공공성과 비평성을 동시에 확보하기는 어렵다. 디자인 아카이브는 단순한 미학적 감상 대상이 아닌,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되어야 하며, 타자적 시선과 비평적 해석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현재의 밀러놀 아카이브는 큐레이션과 콘텐츠가 비교적 ‘자기서사’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정보 제공과 담론 형성 간 균형이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다.

디자인 산업의 ‘기록 기반 전환’ 가속화

밀러놀의 이번 아카이브 개방은 전 세계 디자인 산업에서 ‘디자인의 기록화(record-based design)’가 핵심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제품이나 작가 중심에서 벗어나, 생산과 유통, 마케팅, 수용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화·시각화하는 전략은 향후 디자인 콘텐츠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브랜드 아카이브가 단순한 보관 창고에서 나아가, 미디어·교육·관광·정책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문화 인프라’가 된다는 점은 동시대 산업 트렌드의 구조적 변화로 해석된다. 특히 밀러놀처럼 수직적 생산 체계와 통합된 디자인 역사를 가진 그룹에게 아카이브는 리브랜딩의 도구가 아닌, 장기 전략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사진=MillerKnoll / Willem van Hooff,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한국 디자인 산업에의 적용 가능성과 과제

한국 역시 1970년대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축적된 디자인 유산이 존재하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집약하고 공개하는 공적 시스템은 아직 부재하다. 개별 디자이너나 학교, 기업 단위의 소장품은 점차 증가하고 있으나, 이를 유기적이고 지속가능한 구조로 통합하는 플랫폼은 없다.

밀러놀 아카이브는 단순히 따라야 할 선례가 아니라, 한국 디자인 산업이 추구해야 할 구조적 과제를 던지는 사례로 보아야 한다. 민간 주도의 유산 정리, 공공기관의 접근성 강화, 디지털 전환을 통한 정보의 평등한 분배 등이 동시에 병행될 때, 디자인 아카이브는 콘텐츠 산업과 문화 산업의 중간 거점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KtN 리포트

밀러놀 아카이브의 개방은 디자인 산업의 구조적 전환과 문화적 자산화 흐름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동시에, 그 구조와 운영의 한계는 공공성과 개방성이라는 현대 아카이브의 기준을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디자인 산업이 단지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기억과 기록의 산업으로 전환되고 있는 현재, 밀러놀의 선택은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에 수반되는 과제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