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nce Insight①] 외국 자본 12억 달러 베팅이 보여준 '코리아 리포지셔닝'의 시작
지배구조 개혁과 자본시장 신뢰 회복 사이, 글로벌 자금의 ‘구조적 시선’
[KtN 박채빈기자] 2025년 상반기, 글로벌 자금이 한국 증시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단기 투기성 매매가 아니라, 법제도 변화와 기업행태 개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구조적 베팅이다. 미국계 애버딘 인베스트먼트와 프랭클린템플턴, 유럽계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 등 대형 자산운용사가 중심에 있다. 총 12억 달러 규모의 신규 유입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한국 시장의 ‘평가 축’이 바뀌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 중심에는 새 정부의 상법 개정안과, 이를 둘러싼 기업의 가치 제고 움직임이 있다. 160여 개 상장사가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의 계획을 발표했고, 외국인 순매수는 18조 원을 넘어섰다. 변화는 시작되었고, 자본은 반응했다.
상법 개정안이 바꾼 투자자의 판단 기준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기존 경영 책임의 범위를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고 있다. 감사위원 선임 과정의 개선, 전자투표제의 상시 도입 등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에 체질적 변화를 예고한다.
그동안 한국 증시는 낮은 주주환원율, 순환출자 등 불투명한 구조로 인해 만성적 저평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라 불리는 이 구조적 저평가는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하나의 리스크 요인이자 회피 사유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은 그러한 리스크 해소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도적으로 제시했다. 그 점에서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이번 법안의 상징성과 실효성을 동시에 평가하고 있다. 특히 “기회는 항상 초기 징후에서 출발한다”는 글로벌 기관의 언급은, 한국 증시를 향한 전략적 시선을 재조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업들의 ‘밸류업’, 구조 개편의 실질 신호인가
이재명 정부는 일본의 밸류업 전략을 적극 참고하고 있다. 2024년 발표된 '기업 밸류 제고 가이드라인' 이후, 실제로 160개 이상의 상장기업이 자사주 매입 확대, 배당금 증액 등을 포함한 계획을 제출했다.
코스피 상장사의 2024년 배당 총액은 44조 원으로 전년 대비 12% 증가했고, 자사주 매입 규모는 18.7조 원으로 2배 이상 확대됐다. 기업들의 이러한 변화는 과거와 달리 보여주기식 발표를 넘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가시적인 ‘행동의 전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2025년 들어 외국인 투자자들은 반도체, 소재, 수출주를 중심으로 순매수세를 강화하며 코스피 지수는 2,800선을 돌파했다. 이는 기대가 아닌 실적이 움직인 흐름이라는 점에서, 자산운용사들의 장기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주목한 ‘기업지배구조’의 방향성
애버딘, 프랭클린템플턴, 헤르메스 등은 한국 기업이 반도체, 이차전지 등 전략 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구조 취약성과 주주권 보호 부재로 인해 저평가 상태가 장기화됐다고 진단해왔다.
이들 기관은 “한국 기업의 PBR(주가순자산비율)은 선진국 대비 52% 수준이며, 우선주 할인율은 평균 50%, 지주사 할인율은 최대 65%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제도적 신호만으로도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구조적 여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상법 개정은 이러한 단층을 뚫는 첫 번째 도전이며, 외국 자본은 이를 ‘정치적 모멘텀’이 아닌 ‘시장 구조 개편’의 신호로 판단하고 있다.
외국인 자금 유입, 일시적 현상인가 구조적 흐름인가
외국인 순매수가 구조적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여부는 세 가지 축에 의해 결정된다.
정책의 이행력: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여부와 시행 속도는 단기 시장 기대감의 지속성을 좌우한다. 밸류업 계획을 제출한 160개 기업 중 실제 실행에 나선 비율은 아직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글로벌 환경 변수: 미국 금리 인하 기대, 원화 강세(1,350원대 유지), 환율 안정은 외국인 유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나, 대외 리스크(미국 보호무역, 지정학 리스크)는 상존한다.
기업 실적과 산업 매력도: 반도체, 2차전지, 소재 등 주력 산업의 경쟁력과 실적은 자금 유입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매수세는 외국인 순매수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코리아 리포지셔닝’, 구조개혁이 증시 재평가를 이끌까
상법 개정이 단순한 제도 조정이 아닌, ‘자본시장 내 역할의 재구성’으로 이어질 경우, 한국 증시는 PBR 재평가가 가능하다. 일본의 밸류업 정책이 3년간 TOPIX 지수를 60% 상승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 증시가 유사한 궤적을 밟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 기업 투명성 확보, 소액주주 보호 등 제도와 문화 양면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상법 개정안은 그 첫 단추일 뿐이며, 실질적 변화는 기업의 선택과 정치의 합의에 달려 있다.
외국 자본의 12억 달러는 ‘베팅’이 아닌 ‘평가’다
외국 자본의 대규모 유입은 단순한 베팅이 아니다. 제도 개선과 기업의 자발적 변화에 대한 시장의 평가이며, 나아가 구조개혁이 실제 자산가치에 반영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이재명 정부의 상법 개정이 예고한 변화가 실현되고, 기업의 주주친화적 경영이 지속될 경우, 한국 자본시장은 '할인 시장'이 아닌 '재평가 시장'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다만 정치적 갈등이나 국제금융 리스크가 이 흐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과 정부 모두 ‘속도’와 ‘신뢰’라는 이중 과제를 풀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