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100 리:디코드①] 뉴 다이아스포라, 팝의 판을 갈다
HUNTR/X와 Saja Boys, 그리고 K-팝 인접 생태계의 약진
[KtN 신미희기자] 8월 초, 로스앤젤레스 한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곡은 HUNTR/X의 ‘Golden’이었다. 세련된 팝 비트에 얹힌 랩은 영어였지만, 억양 속에는 분명 한국어 특유의 리듬이 배어 있었다. 주문을 받던 바리스타는 흥얼거리며 컵을 채웠고, 옆자리 20대 커플은 휴대폰을 꺼내 곡 제목을 검색했다. 이제 ‘다문화’는 장르가 아니라, 팝 음악의 기본 배경이 되었다.
집단으로 부상한 아시안 디아스포라
8월 9일자 빌보드 핫100 상위권에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계열 아티스트들의 이름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HUNTR/X는 2위 ‘Golden’을 비롯해 19위 ‘How It’s Done’, 29위 ‘What It Sounds Like’, 33위 ‘Takedown’까지 4곡을 올렸다. 멤버 EJAE, Audrey Nuna, REI AMI는 모두 한국계이며, 미국과 아시아를 오가며 작업한 경력이 짙다.
Saja Boys는 9위 ‘Your Idol’과 16위 ‘Soda Pop’으로 차트 상위권에 자리 잡았다. Andrew Choi, Neckwav, Danny Chung, Kevin Woo, samUIL Lee 등 멤버 대부분이 K-팝과 미국 팝 시장을 동시에 경험한 인물들이다.
중요한 건 이들이 개별 스타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대로 집단 부상했다는 점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아시안 뮤지션이 핫100 상위권에 동시에 여러 팀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손에 꼽혔다. 이제는 차트 한 장에서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늘었다.
‘K-팝’과 ‘팝’ 사이의 새로운 경계선
이들을 단순히 ‘K-팝’으로 묶기에는 좁다. 전곡을 영어로 부르기도 하고, 한국어 가사는 일부만 차용한다. 그러나 창작 과정과 인력 네트워크는 분명 K-팝 산업권과 맞닿아 있다. Andrew Choi와 Neckwav는 SM·JYP·하이브 송라이팅 캠프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Danny Chung은 BTS와 블랙핑크의 작사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음악학자 에밀리 최는 “이들은 K-팝의 훈련 시스템과 미국 팝의 마케팅 구조를 동시에 활용하는 세대”라며, “양쪽 시장의 알고리즘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다언어 플레이리스트, 이제는 표준
스트리밍 플랫폼의 대표 팝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절반 가까이가 다언어 트랙이다. HUNTR/X의 ‘Golden’은 ‘Today’s Top Hits’와 ‘Pop Rising’에 동시에 오르고, Saja Boys의 ‘Your Idol’은 팝뿐 아니라 라틴 팝과 R&B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더 이상 언어가 차트 진입의 장벽이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미국 중서부 CHR(Contemporary Hit Radio) 네트워크 음악 디렉터 마이클 그린은 “몇 년 전만 해도 외국어 가사가 10초만 들어가도 회의에서 거부감이 컸다”며 “이제는 발음과 국적보다 멜로디와 비트의 보편성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연결로 움직이는 ‘네트워크 경제’
아시안 디아스포라 아티스트들의 성공 뒤에는 치밀한 협업 네트워크가 있다. EJAE는 HUNTR/X 활동 외에도 Rumi, JINU와 함께 28위 ‘Free’에 참여했다. Andrew Choi는 Saja Boys 외에도 다양한 팝·K-팝 트랙에 이름을 올린다. 이 관계망을 도식화하면 중심 노드에서 여러 곡과 아티스트로 뻗어 나가는 거미줄이 드러난다.
이 구조의 강점은 진입 장벽이 낮다는 데 있다. 네트워크에 합류하면 단 한 번의 세션 참여만으로도 글로벌 차트 진입 가능성이 열리지만, 밖에 있는 이들에게 그 문은 여전히 무겁다.
산업 구조를 바꾸는 세대
이 흐름은 ‘K-팝의 해외 확장’이라는 범주를 넘어, 팝 산업의 주체 구조를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미국·영국 중심의 제작 시스템에 아시아 인력이 일부 참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아시아계 아티스트와 제작자가 제작 의사결정과 마케팅 주도권을 쥔다.
▶A&R 전략 변화 — 글로벌 레이블이 아시아 인력 풀을 장기 계약과 투자 대상으로 본다.
▶시장 분산화 — 한 지역에서 터진 히트가 순차적으로 전 세계에 퍼지는 모델이 줄고, 아시아·미국·유럽에서 동시 진입하는 구조가 늘어난다.
다음 파도는 이미 시야에
전문가들은 이 흐름이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2030년대 팝 시장의 기본 구조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문화평론가 마크 한은 “HUNTR/X와 Saja Boys 세대는 BTS·블랙핑크와 달리 ‘국적 마케팅’에 의존하지 않는다”며, “그들의 청중은 태그보다 플레이리스트에서 만난다”고 말했다.
다음 파도는 이미 다가오고 있다. 한국, 미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잇는 크로스보더 팝·힙합 프로젝트가 연내 발매를 앞두고 있다. 그 노래는,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미 당신의 플레이리스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