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금의 굴절④] 홍개록의 시대 — 북아프리카가 연 ‘녹차’의 문

전쟁 이후, 길을 바꾼 차 산업

2025-08-15     임우경 기자
대만의 녹차는 식민 체제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고, 기술력 또한 일본식 증청(蒸靑)에 국한돼 있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대만은 황폐했다. 전쟁 동안 차 재배 면적과 생산량은 1917년 대비 90% 이상 줄어들었고, 국제 거래망은 끊겼다. 이제 막 대만을 접수한 국민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외화 확보였다. 전시 경제에서 평시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차는 여전히 달러와 파운드를 벌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품목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이었다.

전통적인 홍차 수출 시장인 영국·미국은 이미 인도·실론이 장악했고, 가격 경쟁에서도 대만산은 밀렸다. 국민정부는 여기서 전략적 회전을 시도한다. 바로 홍차에서 녹차로의 전환 — 이른바 ‘홍개록(紅改綠)’이었다.

모로코·리비아·이집트 — 새로운 블루오션

1950년대 초, 대만은 북아프리카·중동 시장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중국 녹차, 특히 ‘건녹(乾綠)’과 ‘증녹(蒸綠)’에 익숙했다.

모로코의 민트티 문화, 리비아와 이집트의 일상적인 녹차 소비 습관은 대량 수요를 보장했다. 대만은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가격 경쟁력: 대만산 녹차는 품질 대비 가격이 합리적이었고, 중국 내륙의 정치 혼란기(국공내전·문화대혁명) 동안 안정적인 공급을 제공했다.

▶포장·라벨 현지화: 아랍어 표기, 이슬람 문화 코드 반영 디자인. 녹색·금색 패키지가 주류였고, 북아프리카식 다관·찻잔 이미지가 인쇄됐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1960년대 후반, 대만산 녹차는 모로코·리비아·이집트에서 중국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특정 연도에는 점유율에서 앞서기도 했다.

생산 구조의 재편

녹차 수출 확대는 품종과 가공 기술의 변화를 불러왔다.

▶품종: 대량생산에 적합한 황감종(黃柑種) 재배 확대. 수확량이 많고 잎 크기가 커, 북아프리카식 대량 추출에 적합했다.

▶가공: 전통적인 반발효 공정보다 짧은 살청·건조 공정이 주류가 되었고, 기계화 비율이 높아졌다.

▶수확 주기: 연간 4~5회 다회 수확 체계로, 균일한 품질과 안정된 공급량을 확보했다.

이 시기 대만 차 산업의 수출 품목 구성은 급격히 변했다. 녹차가 전체 차 수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홍차의 비중은 급감했다.

1954년 대만 녹차 수출의 90% 이상이 모로코로 향했다. 그러나 스모키한 초청 녹차가 맛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일본 시장과의 균형

북아프리카 시장 개척과 동시에, 일본 역시 중요한 녹차 수출 대상국이 되었다. 일본은 전후 고도성장기(1950~70년대)에 자국 내 녹차 소비가 급증했지만, 기후·면적 한계로 인해 수입에 의존했다.

대만산 녹차는 일본의 ‘센차’ 가공용 원료로 쓰였고, 이를 위해 청심대유(青心大冇)와 같은 고품질 품종의 재배가 유지됐다. 이로써 대만 차 산업은 저가 대량 생산(북아프리카)**과 고품질 프리미엄(일본)**의 이중 트랙을 동시에 운영하게 된다.

‘홍개록’의 그림자

그러나 녹차 중심 수출 구조는 장기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가격 압박: 북아프리카 수입상들은 대만·중국·인도 간 가격 경쟁을 유도해 납품 단가를 지속적으로 낮췄다.

▶품질 고정관념: 대만산 = 대량·저가 녹차라는 인식이 형성되며,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 구축이 어려워졌다.

▶내수 취향과 괴리: 대만 내 소비자는 여전히 우롱차를 선호했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 간 품종·가공 체계가 분리됐다.

산업사적 의미

홍개록 정책은 대만 차 산업이 전후 폐허에서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안정적인 해외 수요처 확보, 품종·가공 기술의 현대화, 농가 소득 회복이라는 단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동시에 브랜드 포지션의 저가화와 품종 양극화라는 구조적 부담도 남겼다. 이 문제는 이후 1980~90년대 고산 우롱 부상과 빈랑 확산기까지 이어진다.

오늘의 시사점

지금의 대만 차 산업은 다시 한 번 글로벌 시장 재편에 직면해 있다. 기후 변화, 경쟁 산지 확대, 소비자 취향 다변화 속에서 ‘녹차 수출 성공’이 준 교훈은 분명하다.

▶단기 수익을 위해 시장·품종·가공 체계를 지나치게 고정시키면, 장기 경쟁력은 약화된다.

▶현지화 전략은 필수지만, 동시에 본원적 브랜드 가치와 품질 다양성을 유지해야 한다.

홍개록의 성공과 한계는, 오늘날 ESG·프리미엄 전략을 고민하는 모든 농식품 산업에 시사점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