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금의 굴절⑥] 일본 고도성장과 ‘센차’ 수요 — 관서홍차의 전환기술

전환기의 신호—북아프리카에서 일본으로

2025-08-17     임우경 기자
한 잔의 차 속에는 수천 년에 걸친 문화적 유산과 감각적 깊이가 깃들어 있다. [온넬: ONNEL]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 1970년대 후반, 대만 차 산업의 수출 구도에 변곡점이 나타났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의존하던 대량 녹차 수출은 가격 경쟁 심화와 중국·베트남의 진입으로 점차 수익성이 떨어졌다. 반면, 일본은 고도성장기(1950~80년대)를 지나면서 차 소비량이 증가했고, 특히 센차(煎茶)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었다.

일본 국내 생산만으로는 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기후·면적 한계로 인해 품질이 일정한 원료 확보가 시급했다. 이때 대만의 청심대유(青心大冇)는 일본 바이어의 눈에 띄었다. 발효도를 낮춰 가공하면, 일본식 센차와 유사한 깔끔한 맛과 선명한 녹색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서홍차의 기술 전환

문제는 대만의 가공 체계였다. 당시 대만의 저지대 수출형 차 산업은 홍차·녹차 대량 가공 설비가 중심이었다. 일본식 센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공정이 필요했다.

▶살청 방식 전환: 전통적인 팬파이어(pan-fired) 방식에서 일본식 증기 살청(蒸青)으로 변경.

▶형태 가공: 둥근 말차형이 아닌 가늘고 길게 말린 바늘형 잎 모양 구현.

▶색·향 유지 기술: 저온 건조와 산소 차단 포장으로 신선함 유지.

이 변화는 관서홍차 가공공장(關西紅茶工廠) 같은 대형 가공 시설에서 시작됐다. 일부 공장은 설비를 개조해 센차 라인을 도입했고, 일본 기술자와의 협업으로 품질을 안정시켰다.

일본의 품질 지향과 계약 재배

일본 바이어들은 품질을 철저히 관리했다.

▶품종 지정: 청심대유 중심 재배, 수확 시기·방법까지 계약서에 명시.

▶가공 기준: 수분 함량, 색도, 잎 형태, 향미 지표를 수치화해 납품 조건으로 제시.

▶장기 계약: 일정 물량·가격을 보장하는 대신, 품질 불량 시 전량 반품 가능.

이 계약 재배 모델은 청심대유 재배 농가의 소득 안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일본 시장 의존도를 높이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내수와 수출의 이중 트랙

이 시기 대만 차 산업은 내수용 고산 우롱과 일본 수출용 센차 원료라는 이중 트랙 구조를 확립했다.

▶내수: 리산·대우령 고산 우롱 중심. 향미·부드러운 감미를 선호하는 대만 소비자 맞춤형.

▶수출: 저발효·증기 살청한 청심대유 중심의 센차 원료. 일본 시장의 계절별 수요에 맞춰 생산.

이 구조는 단기적으로 산업 안정성을 높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 다변화 지연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북미·유럽 등 잠재 시장에 대한 전략적 투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대만의 차밭 / 사진=ⓒ 원근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술 전환의 파급 효과

관서홍차를 필두로 한 가공 기술 전환은 대만 차 산업 전반에 몇 가지 긍정적 효과를 남겼다.

▶가공 표준화: 일본식 품질 관리가 도입되면서, 내수·수출 모두에서 가공 일관성이 향상.

▶설비 현대화: 기존 팬파이어 설비 외에 스티밍·롤링·건조 라인이 보급.

▶품종 관리 강화: 계약 재배를 통한 청심대유 중심의 고품질 재배지 확대.

그러나 동시에, 품질 기준이 일본 소비자 취향에 맞춰져 다른 해외 시장에는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도 드러났다.

일본 의존의 함정

199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 버블 붕괴와 함께 차 소비량이 감소하자, 대만 차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장기 계약이 축소되고, 일부 계약 농가가 판로를 잃었다. 이는 일본 의존도가 높았던 청심대유 재배지의 위기로 이어졌다. 일부 농가는 내수 고산 우롱 시장으로 전환했지만, 저지대·평지 재배지는 품종·기후 한계로 인해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다.

산업사적 의미

관서홍차의 기술 전환은 대만 차 산업이 품종·가공 기술을 시장에 맞춰 유연하게 전환한 사례다. 품질 지향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단일 시장 의존의 리스크도 함께 각인시켰다. 이 경험은 오늘날 차뿐 아니라, 커피·코코아·와인 같은 농산물 산업이 특정 국가·문화권의 수요에 맞춰 제품을 표준화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보여준다.

오늘의 시사점

유연한 기술 전환은 위기 극복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다변화 없이는 의존 리스크를 피하기 어렵다. 품종·가공·브랜딩이 동시에 움직여야 장기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관서홍차의 전환 기술은 대만 차 산업이 “품질 기준을 세계화하면서도 시장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준 채, 고산 우롱의 부상과 함께 다음 장을 향해 나아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