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①] OTT가 바꾼 드라마 권력 지도
방송사에서 플랫폼으로, 권력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KtN 전성진기자]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5년 베트남 콘텐츠산업동향 15호에 따르면, 베트남 드라마 산업은 지금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의 생명줄은 방송사에 달려 있었다. 저녁 8시 프라임타임, VTV가 송출하는 가족 드라마는 시청률을 독점했고, 광고주들은 방송사에 몰렸다. 제작사들은 방송사의 편성 여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거실 TV 앞에 모여 시청하는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신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으로 OTT 플랫폼을 통해 드라마를 소비한다. 광고비도 TV에서 디지털로 빠르게 이동하고, 제작사들은 방송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플랫폼과 오리지널 콘텐츠로 성공 사례를 만들고 있다. 산업의 권력이 송출자에서 제작자와 플랫폼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본격화된 것이다.
OTT의 폭발적 성장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 OTT 시장은 2024년 5억 4,580만 달러 규모에서 2029년 7억 7,470만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 7.26%는 전통 TV 시장의 5.94%를 뛰어넘는 수치다. 단순히 시청 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수익의 무게 중심이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광고 역시 TV에서 디지털로 이동하고 있다. 디지털 광고 시장은 2024년 12억 9,000만 달러에서 2030년 28억 8,000만 달러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방송사 광고 모델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으며, 광고주와 브랜드들이 더 이상 전통적인 송출 채널만을 바라보지 않음을 보여준다.
제작사의 반란
과거 제작사들은 방송사와의 관계에서 철저히 을의 위치에 있었다. 편성을 따내야만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었고, 광고 수익은 방송사가 대부분 가져갔다. 그러나 OTT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하면서 판이 달라졌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위한 선판매 계약과 투자 구조가 늘어나면서, 제작사들은 더 이상 방송사에 종속되지 않는다. DatVietVAC 그룹은 대표적 사례다. 자체 제작 채널과 OTT 플랫폼인 VieON을 운영하며 시청자와 직접 연결된다. 2024년 공개된 VieON 오리지널 드라마 7 Nam Chua Cuoi Se Chia Tay는 공개 직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누적 조회수 14억 회를 기록했다. 이 작품은 ‘Mai Vang 2024’에서 주요 부문 3관왕을 차지하며, 방송사 없이도 제작사가 흥행과 수익을 독점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방송사의 대응과 한계
물론 방송사들도 대응에 나섰다. VTV는 VTV Go를, FPT는 FPT Play를, Viettel은 TV360을 내세우며 자체 OTT 서비스를 구축했다. 그러나 여전히 콘텐츠 다양성이나 글로벌 확장성 면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반면 넷플릭스는 글로벌 자본력과 한국 드라마 라인업을 무기로 안정적인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베트남 드라마 시장의 경쟁 구도는 이제 방송사 간 경쟁이 아니라 글로벌 플랫폼과 로컬 플랫폼 간의 대결로 전환되고 있다.
세대가 바꾼 시청 행태
OTT의 부상 뒤에는 세대적 변화가 자리한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는 모바일 퍼스트 환경에 익숙하다.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방송을 기다리는 대신, 틱톡이나 유튜브 숏폼을 통해 드라마 클립을 먼저 소비하고, 마음에 들면 OTT에서 전편을 몰아본다. 반면 부모 세대와 중장년층은 여전히 VTV 일일드라마를 꾸준히 시청한다. 같은 집안에서도 세대별로 완전히 다른 미디어 소비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미디어 격차는 단순한 취향 차이를 넘어 산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권력 이동의 산업적 파장
OTT 중심의 구조 전환은 산업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광고비 이동: TV 중심 광고가 디지털로 빠르게 이전하며 방송사의 수익 기반이 축소된다.
제작사 권력 강화: IP를 보유한 제작사가 협상력과 수익을 독점한다.
플랫폼 중심 경쟁: 글로벌 OTT와 로컬 OTT 간 3파전 구도가 뚜렷하다.
콘텐츠 다양화: OTT는 시청자 데이터를 활용해 맞춤형 장르 실험과 타깃팅이 가능하다.
결국 베트남 드라마 산업은 방송사 중심의 폐쇄적 구조에서 플랫폼 중심의 개방적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KtN 리포트
이 변화는 한국 기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베트남은 단순히 콘텐츠를 수출하는 소비 시장이 아니다. 현지 OTT와의 공동 제작, 오리지널 IP 개발, 세대 맞춤형 콘텐츠 전략이 없이는 지속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Z세대를 겨냥한 숏폼 전략, OTT 오리지널 협력, 아세안 시장 확산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한국 드라마는 이미 베트남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사랑의 불시착이나 응답하라 1988 같은 작품은 방영이 끝난 지 수년이 지나도 꾸준히 소비된다. 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한국 콘텐츠가 현지인의 일상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 기업은 베트남을 단순한 수출 창구로 보는 시각을 넘어, 아세안 콘텐츠 허브로서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OTT가 바꾼 권력 지도는 단순히 새로운 플랫폼의 부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콘텐츠를 둘러싼 힘의 축이 이동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베트남 드라마 산업은 전통과 혁신, 방송사와 플랫폼, 그리고 세대 간 시청 습관이 충돌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생태계는 향후 아세안 전체 콘텐츠 시장을 좌우할 것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주체는 바로 K콘텐츠 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