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③] 리메이크의 빛과 그림자
안전한 모방과 위험한 창조 사이에서
[KtN 전성진기자]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5년 베트남 콘텐츠산업동향 15호에 따르면, 베트남 드라마 시장은 최근 몇 년간 눈에 띄는 흥행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기저에는 ‘리메이크’라는 뚜렷한 흐름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이미 성공한 포맷을 들여와 현지 정서에 맞게 각색하는 전략은 안정적인 시청률을 보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창작력의 고갈과 자국 문화 정체성 약화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베트남 드라마 산업은 지금, 안전한 모방을 선택할 것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오리지널 창작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
성공 방정식이 된 한국 드라마 리메이크
베트남에서 가장 주목받은 리메이크 사례는 한국 드라마다. 2017년 <그녀는 예뻤다>의 베트남판 <Em Là Niềm Kiêu Hãnh Của Anh>는 원작의 흥행력을 바탕으로 높은 화제성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Cha Tôi, Người Ở Lại>가 현지 정서와 가족 중심 서사를 더해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 드라마 특유의 감각적 연출과 트렌디한 패션, 음악은 베트남 젊은 세대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원작의 인지도가 높은 만큼 마케팅 비용 대비 효과도 크다. 이는 리메이크가 제작사와 플랫폼 모두에게 ‘안전한 투자’로 간주되는 이유다.
중국·일본 포맷의 진입
한국 드라마 외에도 중국과 일본 포맷이 베트남 시장에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중국의 청춘 로맨스와 일본의 미스터리 장르는 각각 다른 팬덤을 형성하며, 현지 제작사에게 다양한 장르 실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흥행력과 대중적 파급력에서는 한국 포맷이 압도적이다. 이는 베트남 대중문화 소비가 한국과 문화적으로 가깝고, 한류의 지속적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창작의 빈자리
문제는 리메이크가 늘어날수록 오리지널 콘텐츠의 자리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 드라마 제작 편수 중 리메이크 작품의 비중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으며, 제작사 입장에서는 실패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점점 더 해외 포맷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산업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치고, 베트남만의 정체성을 담은 이야기 생산을 위축시킨다. 베트남 사회의 특수한 역사, 지역 문화,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반영한 서사가 줄어드는 것은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도 치명적이다.
시청자의 양가적 태도
흥미로운 점은 시청자들도 리메이크를 바라보는 태도가 엇갈린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한국 드라마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비교하며 보는 재미’를 즐기고, 부모 세대는 현지 배우와 문화적 코드가 담긴 버전을 더 편하게 소비한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은 지나친 모방이 식상하다고 지적하며, “왜 베트남만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한다. 리메이크의 성패는 결국 ‘현지화의 정도’와 ‘원작과의 차별성’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느냐에 달려 있다.
리메이크의 확산은 베트남 드라마 산업에 양면성을 남긴다.
긍정적 효과: 안정적 투자 회수, 시청률 확보, 제작 역량 축적, 글로벌 포맷 이해도 상승
부정적 효과: 오리지널 IP 개발 지연, 창작 인재의 의욕 저하, 장기적 정체성 약화
결국 리메이크는 성장 초기 단계의 시장에서 유용한 도구일 수 있지만, 산업이 성숙할수록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 된다.
KtN 리포트
베트남 드라마 산업이 지금의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리메이크에만 의존할 수 없다. 안정적인 포맷 수입과 병행해 오리지널 IP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특히 지역 문화와 사회적 이슈를 반영한 드라마는 베트남 시청자에게 더 깊은 공감을 줄 수 있으며, 아세안 시장 전체로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현지 제작사들이 국제 공동 제작에 적극 나서고, 창작 인재를 양성하는 생태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기업에게도 기회는 있다. 단순히 원작을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베트남 제작사와 협력해 공동 창작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 리메이크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글로벌 히트작을 만들 수 있다. 한국 드라마의 경험과 시스템을 공유하면서도, 베트남만의 색깔을 살리는 협업은 장기적으로 아세안 전체에 긍정적 파급력을 낳을 것이다.
안전한 리메이크의 길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산업이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모방을 넘어 창조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베트남 드라마 산업은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K콘텐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