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트렌드] 존재의 문턱에서 ... 홍설작가의 「존재의 시작」이 던지는 질문
홍설작가 「존재의 시작 The Threshold of Being」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 마주하다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홍설작가의 회화는 유기적 형상의 은유를 통해 감정과 존재의 문제를 꾸준히 환기해 왔다. 이번에 제시된 작품 「존재의 시작」은 홍 작가의 작업 세계의 핵을 비교적 명료한 구도와 제한된 도상으로 압축한다. 화면은 아치형의 외곽, 그 안으로 파고드는 통로, 좌우의 암실, 상부의 구슬 군집, 중앙의 발광하는 원형 방으로 구축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관람자는 경계와 통과, 가능성과 현실 사이의 긴장 위에 서게 된다. 작품이 노리는 지점은 탄생의 서사 자체가 아니라 탄생 직전의 문턱, 다시 말해 선택이 이루어지는 찰나의 상태다. 제목이 말하듯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시작이 발생하는 조건이며, 그 조건을 시각적 문법으로 변환하는 과정에 홍설의 고민이 응결되어 있다.
전체 구조는 건축적이다. 둥근 아치가 화면을 감싸며, 안과 밖을 나누는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다만 단절을 강조하기보다 연결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관람자는 문지방에 선 듯한 신체적 감각을 얻게 된다. 이 아치의 상단에는 보랏빛 주름 조직이 이어지고 그 위를 연둣빛 구슬의 행렬이 따라 흐른다. 구슬은 형태적으로 통일되어 보이지만 크기와 간격의 미세한 차이가 있다. 화면의 서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이는 무수한 가능성의 총합이자 확률적 우연과 생물학적 조건이 결합한 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좌우 암실은 푸른 심연의 질감으로 채워져 있으며 미세한 소용돌이 흔적이 깊이를 만든다. 각 암실 바닥에 놓인 고독한 구슬 한 점은 상부의 다중 가능성과 대비를 이루며, 선택된 단일성의 표식처럼 작동한다. 시선은 결국 열쇠구멍을 닮은 통로를 지나 중앙의 둥근 방에 이른다. 이곳에서 빛은 스스로 발광하는 듯 번져 나오고, 중심부에서 8 갈래의 싹이 방사형으로 펼쳐진다. 과장된 극적 효과 없이도 화면은 응축과 발화의 리듬을 생성한다.
색채는 작품의 감정선을 좌우한다. 홍설은 작업 전반에서 색을 감정과 생명 에너지의 언어로 다루어 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청색 스펙트럼을 주조로 택하고 연둣빛 하이라이트로 사건의 지점을 명시했다. 외곽의 담청, 암실의 남청, 중앙부의 시안이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으로 연결되어 차가운 울림을 만든다. 이 차가움은 냉정함과는 다르다. 빛을 머금은 청색은 내부로 수렴하는 집중의 감각을 강화하고, 연둣빛 구슬과 중앙 방사의 밝기는 가능성이 현실로 점화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표면은 매끈하고 광택이 억제되어 있어 반사광의 간섭이 적다. 각 영역을 구획하는 윤곽선은 날카롭지 않고, 두께가 미세하게 흔들려 유기체적 호흡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색과 표면의 조합은 관람자가 화면 앞에서 호흡을 늦추고 머무르게 만드는 조건을 제공한다.
도상학적으로 보자면 작품은 소수의 기호를 정돈해 높은 해석 밀도를 확보한다. 포털과 통로는 경계와 통과의 상징이고, 구슬은 가능성의 단위이며, 암실은 축적과 잠복의 장소, 방사형 싹은 현실화의 지문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호들이 서로 분리된 층위가 아니라 하나의 계열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상부의 군집, 암실의 단독, 중앙의 발광이 물질적 친연성을 띠도록 조형되어 있기 때문에, 관람자는 가능성에서 선택, 선택에서 존재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홍설은 생물학적 도상을 빌리되 사실적 묘사나 상징의 단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 과잉의 정보나 자극을 경계하면서, 관람자의 해석이 스스로 생성되도록 여백을 준다. 이러한 비설명성의 태도는 작가가 그간 강조해 온 미학적 윤리와도 부합한다.
철학적 층위에서 작품은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아치 상단의 군집은 잠재성의 바다를, 중앙 방사는 현실태로의 전화가 발생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이러한 배치는 고전 형이상학의 어휘와도 호응하지만, 동시에 현상학적 읽기를 촉발한다. 관람자는 화면을 멀리서 대할 때 기하학적 질서와 전체 리듬을 먼저 인지하고, 서서히 다가갈수록 구슬의 광택, 보랏빛 조직의 미세한 틈, 암실의 소용돌이 결을 촉각적으로 더듬게 된다. 거리를 오가며 반복되는 이 시선의 호흡은 문턱에서 망설이는 몸의 기억을 일으킨다. 홍설은 바로 이 신체적 체험을 통해 언어 이전의 감각, 말해지지 않은 상태의 정서를 환기한다. 존재는 언어보다 먼저 형태로 말한다는 작가의 전제는, 이 작품에서 감각의 리듬과 표면의 질서로 설득력을 얻는다.
작가의 연작 맥락에서 보면 「존재의 시작」은 기원부를 담당하는 장면이다. 홍설은 감정의 내러티브를 씨앗, 껍질, 개화 같은 생장 이미지로 사유해 왔고, 억눌림과 해방의 곡선을 다층적인 유기체 도상으로 번안해 왔다. 이번 작품은 그 연속체의 문지방에서,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발생하는 조건과 구조에 집중한다. 이전의 화면이 풍부한 촉수와 망상 패턴으로 팽창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여기서는 정보를 절제해 핵심 사건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회화적 장식성을 빼고 구조와 리듬에 집중한 결정은, 관람 템포를 느리게 하고 몰입을 깊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도 몇 가지 접점을 확인할 수 있다. 생명과학의 언어를 차용하는 이른바 뉴바이오 계열 작업이 늘어나는 가운데, 홍설은 실험실적 사실주의나 기술 매체의 효과에 의존하지 않는다. 회화라는 느린 매체 안에서 세포, 조직, 수정, 자궁을 연상시키는 기호를 감정과 존재의 은유로 번역하고, 보편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도상을 정제한다. 팬데믹 이후 강조된 정서적 전환의 흐름과도 접속한다. 관람자가 예술에서 찾는 것이 격정적 충격보다 안정된 몰입과 감정의 자가 조절에 가까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홍설의 포털 형식은 호흡을 정리하고 감각을 재설정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과장 없이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는 화면은 강요하지 않고 초대하는 방식으로 감정의 진입로를 제공한다.
작품의 강점은 구조적 명료성과 상징 체계의 일관성, 그리고 과장되지 않은 서정에 있다. 포털과 통로, 핵의 계층이 분명하여 시선이 헤매지 않고, 색채와 도상은 작가가 축적해 온 체계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현장 감각을 확보한다. 무엇보다 생식·출산 이미지를 과소비하지 않으면서도 탄생의 사유를 설득력 있게 환기하는 점이 균형 있는 미덕으로 평가된다. 관람자의 해석을 가두지 않으려는 태도는 회화의 여백을 살아 있게 하고, 그 여백이 관람자의 경험을 작품의 일부로 편입한다.
동시에 몇 가지 숙제도 보인다. 열쇠구멍, 구슬, 방사 같은 문법이 지나치게 명료한 만큼 동일한 구성의 반복은 상징의 관습화를 부를 수 있다. 세포·자궁·수정 도상은 동시대 시각문화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차후에는 동일 어휘를 다른 방식으로 굴절하거나, 전혀 다른 비유 체계를 잠시 도입해 문법의 갱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색조 역시 청색 중심의 안정성이 전시 단위에서 누적될 경우 장면 간 고저 차를 약화시킬 수 있다. 명도·채도·온도의 스펙트럼을 보다 과감하게 조정해 내러티브의 다이내믹을 확보하는 방안이 고려될 만하다. 이러한 지적은 작품의 성취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명료함을 미래의 확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제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시 연출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동선의 관문 혹은 전환부에 배치될 때 효과가 크다. 주변 조도를 과도하게 올리지 않고, 캔버스 하단의 시야가 트이도록 설치하면, 중앙 방사의 발광과 암실의 깊이가 더 선명해진다. 같은 계열의 작품들이 나란히 놓일 경우 색 온도나 표면 질감이 다른 한 점을 사이에 둬 리듬 변화를 만들면, 문법의 단조로움을 피하면서 연속적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다. 관람자가 작품 앞에서 서성거릴 여유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그림은 멀리서 구조를 파악하고, 중간 거리에서 도상을 읽고, 가까이에서 표면을 더듬는 세 단계의 시간이 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열리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시작」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을 정돈된 조형 질서로 제시하는 작업이다. 홍설은 생물학적 기호를 빌리되 사실적 재현이나 과장된 신화화를 피하고, 관람자의 감각과 해석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구조를 설계한다. 청색의 심연과 연둣빛의 점화가 만드는 긴장, 포털과 핵의 분명한 거리감, 과장되지 않은 표면의 호흡이 합쳐져, 화면은 조용하지만 밀도 높은 사건으로 완성된다. 이 점에서 작품은 작가의 장기인 비설명성과 감정의 조형적 번역이 성숙한 단계에 올라섰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전통적 도상의 관습화라는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문법의 갱신을 예견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유의미하다.
홍설작가의 회화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존재는 언어보다 먼저 형태로 말한다. 이 작품은 그 발화의 순간을 과장 없이 기록한다. 관람자는 화면 앞에서 잠깐 멈추고, 자신의 호흡을 그림의 호흡과 맞춘다. 멈춤 뒤에 따라오는 미세한 떨림이 곧 시작의 증거다. 시작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가 우리 모두의 내부에서 여전히 진행 중임을 홍설은 조용한 푸른 빛 속에 오래 머물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