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기획] 억압의 기억을 넘어 감정의 형상으로, 홍설 작가 인터뷰
인도에서의 체험과 선인장의 은유, 그리고 다층적 매체 실험으로 확장되는 K-아트의 지평
[KtN 박준식기자]홍설 작가(Hongseol)의 작품에는 억압과 해방이 교차하는 기억의 층이 응축돼 있다. 곡선과 주름, 가시와 덩어리로 이루어진 유기적 구조는 낯설지만, 내면을 향한 감각적 언어로 다가온다. 인도에서 경험한 종교적 규율과 금기, 그리고 축제에서의 해방적 색채 체험은 작품 세계의 뿌리다. 홍설 작가는 그 기억을 미학적 실험으로 전환해 회화와 도자, 향, 디지털 아트로 확장하며 감정의 생태학을 구축해왔다.
인도에서 시작된 억압과 해방의 기억
홍설 작가는 청소년 시절 인도에서 제인교 계열 학교에 다녔다. 당시의 생활은 엄격한 규율로 가득했다. 음식의 선택부터 옷의 색깔까지 제한이 있었고, 신체 노출에 대한 규제도 강했다. 그러나 종교 행사에서는 온몸에 색을 뿌리고 씻어내는 의식이 있었다. 홍설 작가는 이를 통해 억압과 해방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경험을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홍설 작가는 “일상에서는 옷의 색마저 규제되었지만, 종교적 의식에서는 색을 몸에 쏟아붓고 씻어내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억압과 해방이 동시에 제 안에 각인된 셈이죠. 지금 작품에서 색을 겹겹이 덮고 지우는 과정은 그때의 체험을 예술적 언어로 바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작품 속 겹겹의 색과 흔적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금기와 해방의 반복을 담은 구조다. 색을 지우며 남은 흔적은 상처가 아니라 새로운 층위의 감정으로 전환된다.
선인장과 바이오모피즘, 존재의 은유
홍설 작가가 선인장이라는 소재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미국 조슈아트리에서의 체험이었다. 건조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는 선인장은 가시로 외부를 막으면서도 내부에 물과 부드러운 살을 품고 있다. 이 양가적 구조는 인간의 감정과 닮아 있다.
홍설 작가는 “선인장은 외부를 향해 날카로운 방어막을 드러내지만, 그 안에는 연약한 생명력을 숨기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도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내면은 취약합니다. 그 양면성을 표현하기에 선인장은 적합한 대상이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작품 ‘속을 품을 선인장들’은 유방을 닮은 유기체와 촉수 같은 주름진 형상을 병치하면서, 욕망과 방어, 억눌림과 해방이 공존하는 정서를 드러낸다. 홍설 작가에게 선인장은 단순한 식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 감정의 구조를 담아내는 상징적 기호다.
감정의 시각화, 언어 이전의 탐구
홍설 작가의 작품은 언어로 정의되기 전 단계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씨앗, 주름, 틈, 신체를 연상시키는 유기체가 반복 등장하는 이유다.
홍설 작가는 “감정은 언어보다 먼저 태어납니다. 저는 말로 정의되지 않은 감정을 형태와 색으로 드러내고 싶습니다. 씨앗처럼 응축된 감정이 발아하고, 시냅스처럼 서로 연결되는 순간을 작품으로 표현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표작 ‘감정의 씨앗(The Seed of Emotion)’은 생명의 발생을 닮은 형상으로 감정의 근원을 시각화한다. ‘감정의 시냅스(Synapse of Emotion)’는 두 유기체가 신경계처럼 선으로 연결되는 장면을 통해 관계의 본질과 감정의 교류를 표현한다. 작품 속 긴장과 울림은 관람자에게 감정의 근원적 진동을 상상하게 한다.
작업 방식과 재료의 실험
홍설 작가는 비전공자로 출발했기에 작업의 방법론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빈 캔버스 대신 어두운 바탕을 먼저 칠하고, 그 위에 겹겹이 색을 얹고 지우며 형태를 찾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오일의 농도를 조절해 질감을 달리하고, 크레용이나 색연필로 건식 질감을 더해 무게 중심을 분산시킨다.
홍설 작가는 “겹이 몇 겹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발색과 리듬이 맞는 순간 멈춥니다. 크레용의 질감은 오일의 무게를 분산시키고, 관람자가 가까이에서 표면의 차이를 감각할 수 있게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작품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작은 틈을 남긴다. 관람자가 스스로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백을 의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도자, 향, 디지털로 확장되는 감각
홍설 작가는 회화에서 출발했지만, 최근에는 도자와 향, 디지털 작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도자에서는 흙의 무게와 손끝의 압력이 형상의 성격을 결정한다. 향은 공간과 시간을 매개하며 감정의 층위를 확장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디지털 작업은 원화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고 움직임과 빛을 더해 시간적 경험을 관람자에게 제공한다.
홍설 작가는 “도자 작업에서는 손끝의 감각이 강하게 남습니다. 흙의 물성과 압력이 고스란히 형태로 드러납니다. 향은 공간 속에 시간의 흐름을 만드는 장치입니다. 디지털 작업에서는 원화의 호흡을 해치지 않으면서 움직임을 덧붙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확장은 개인적 실험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 미술시장의 흐름과도 교차한다. Art Basel and UBS Global Art Market Report 2024, The Contemporary Art Market Report 2024가 지적하듯, 여성·비전공 작가의 부상, 크로스오버 예술의 확산, 아시아 미술 시장의 성장세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홍설 작가의 행보는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관람자와의 교감, 열린 구조
홍설 작가는 관람자의 해석을 존중한다. 작품 제목은 의미를 규정하는 장치가 아니라 해석의 통로다.
홍설 작가는 “관객이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경험을 찾을 수 있도록 여백을 남깁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누군가는 상처를, 또 다른 이는 치유를 발견합니다. 그 차이가 작품을 다시 살아나게 만듭니다”라고 강조했다.
작품은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감정의 구조를 제시하고, 관람자가 자신의 기억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열린 구조로 설계된다.
K-아트 속 홍설
홍설 작가의 작업은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현재 국제 미술시장의 변화와 긴밀히 호응한다. 억압과 해방의 서사는 글로벌 컬렉터들이 주목하는 ‘스토리 있는 작품’의 조건과 맞닿아 있고, 비전공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은 제도권 중심의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낸다. 도자와 향, 디지털로의 확장은 크로스오버 아트 흐름과 직결되며, 동양적 정서와 영적 상징은 K-아트의 새로운 좌표가 된다.
홍설 작가는 “저의 작업은 감정을 시각화하고, 결핍을 돌보며, 언어 이전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관람자가 제 작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억압을 해방의 미학으로 전환하는 홍설 작가의 여정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동시대 미술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지점으로 읽힌다. 감정의 생태학을 구축하는 이 작업은 K-아트가 국제 무대에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