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트렌드②] 색상이 만든 정체성

게이밍과 패션의 교차점

2025-10-14     임민정 기자
Herman Miller Introduces New 'Ignite' and 'Nova' Colorways for the Embody Gaming Chair. 사진=Herman Miller Gam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색상은 단순한 미적 장식이 아니라 세대의 언어이자 정체성의 표현 수단이 되었다. 디지털 공간에서 개인은 자신이 선택한 색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게이밍 장비 산업은 이 흐름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였다. 브랜드들은 이제 기능보다 색상으로 사용자를 구분한다. 조명의 색, 장비의 톤, 의자의 질감은 모두 한 개인의 ‘디지털 자화상’을 구성하는 요소다. 색채가 기술보다 먼저 사용자를 설득하는 시대다.

게이밍 하드웨어 산업은 오랫동안 검은색과 붉은색을 상징색으로 유지했다. 성능, 속도, 전투, 에너지 같은 이미지가 강조되며 붉은색은 강렬함의 표식이자 기술력의 은유로 사용됐다. 그러나 시장이 성숙하고 사용자층이 다양해지면서 색의 기능이 달라졌다. 최근 게이밍 브랜드들은 차분한 톤, 뉴트럴 컬러, 파스텔 계열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사용자 구성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게이밍 브랜드의 주요 소비층이 10대 남성에서 20~30대의 다양한 직군으로 확대되면서, 색상은 감성적 코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허먼 밀러의 이그나이트와 노바 시리즈, 로지텍 G의 화이트 에디션, 레이저의 퀵실버 컬렉션, 스틸시리즈의 라벤더 모델 등은 모두 기능이 아닌 ‘분위기’를 판매한다. 흰색, 연회색, 네이비, 버건디 같은 색상은 공간과 어울리는 중성적 디자인을 강조한다. 게이밍 장비가 가정의 인테리어 일부로 들어오면서, 색은 더 이상 장비의 공격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공간과의 조화를 위한 매개로 작용한다.

색상 변화는 산업의 포지셔닝도 바꾸고 있다. 과거 게이밍 브랜드는 강렬한 색으로 ‘성능 중심의 남성 시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하지만 2020년 이후 산업은 점차 ‘디자인 중심의 중성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색이 성별이나 연령 구분의 도구가 아니라, 개인의 작업 환경과 감성적 취향을 반영하는 선택 요소로 전환된 것이다. 패션 업계가 이미 경험한 현상이 하드웨어 산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패션 트렌드 분석 기관 WGSN은 2025년 핵심 색상으로 ‘디지털 라벤더’를 선정했다. 이는 스트레스 완화와 감정 안정의 상징 색으로, 화면 앞에서 장시간 활동하는 세대에게 심리적 균형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게이밍 산업은 이러한 감각 코드를 빠르게 수용했다.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경쟁적으로 차분하고 은은한 색조를 채택하며, 사용자의 집중 환경을 감성적으로 설계하려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게이밍 브랜드의 색상 전략은 패션과 가구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허먼 밀러, 로지텍 G, 스틸시리즈 등 주요 브랜드는 색상 개발 과정에 패션 컬러 디렉터와 공간 디자이너를 참여시키고 있다. 제품 디자인이 아니라 공간 전체의 톤을 고려해 색을 설계한다. 예를 들어 허먼 밀러의 노바 팔레트는 미세한 네이비·보라 톤의 조합을 통해 모니터 조명 반사와 시각 피로를 줄이는 효과를 낸다. 색이 단순한 외형 요소를 넘어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세대 간 정체성의 차이도 보여준다. 이전 세대가 성능, 효율, 기능을 중시했다면, 지금의 세대는 감각, 조화, 자기 표현을 중시한다. 산업적 관점에서 이는 제품이 아니라 ‘경험’을 중심으로 한 시장 재편을 의미한다. 게이밍 체어, 키보드, 마우스 등은 더 이상 개별 장비가 아니다. 각각의 색상과 질감이 하나의 환경을 형성하며, 사용자 경험 전체를 구성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Herman Miller Introduces New 'Ignite' and 'Nova' Colorways for the Embody Gaming Chair. 사진=Herman Miller Gam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내 디자인 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소비자 10명 중 7명이 ‘색상 통일감’을 제품 구매의 주요 기준으로 꼽았다. 특히 여성 소비자의 62퍼센트, 30대 직장인의 58퍼센트가 ‘색의 균형이 집중력에 영향을 준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과는 산업의 무게 중심이 점점 ‘감성적 기능성’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능이 감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기능의 일부가 되는 구조다.

이 변화는 패션 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루이비통, 프라다, 나이키 등 주요 브랜드는 게이밍 플랫폼과 협업하며 색상 중심의 가상 제품 라인을 출시하고 있다. 디지털 아바타를 위한 의상과 장비가 현실의 소비로 연결되면서, 색상은 물리적 제품과 가상 자산을 잇는 공통 언어가 되었다. 색이 곧 브랜드이고, 색이 곧 아이덴티티가 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산업 분석 기관 이코노믹 인사이트는 “색상의 기능이 단순한 감각을 넘어 소비자의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소속을 정의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게이밍 장비의 색상 선택은 개인의 직업, 공간, 라이프스타일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회사원은 중성적 색을 선호하고, 스트리머는 시각적 포인트가 강한 색을 선택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인화 소비의 확산과 맞물려 있다.

색상은 결국 기술보다 오래 남는 정체성이다. 제품의 사양은 세대마다 바뀌지만, 색은 세대의 감각을 기록한다. 게이밍 장비의 색이 변했다는 사실은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 변화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상징하던 ‘경쟁’의 시대에서, 연회색과 라벤더가 상징하는 ‘균형’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허먼 밀러의 색상 전략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바의 짙은 남색은 집중과 안정감을, 이그나이트의 오렌지 포인트는 창의성과 활력을 표현한다. 두 색의 대비는 현대인의 일과 휴식, 몰입과 회복이라는 양면적 리듬을 시각화한다. 제품 자체보다 사용자 상태에 초점을 맞춘 설계 방식이다. 색상이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변화를 고려한 기술 요소로 다뤄지고 있는 셈이다.

게이밍 산업의 색상 변화는 단기 유행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변화를 반영한다. 기술 경쟁이 정점에 이른 이후, 브랜드는 감성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색상은 그 경쟁의 언어다. 소비자는 이제 성능보다 색으로 자신을 구분하고, 브랜드는 색으로 사용자 군을 정의한다. 산업이 색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