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트렌드③] 의자가 사라지는 사무실

착석의 종말과 새로운 공간 구조

2025-10-15     임민정 기자
Herman Miller Introduces New 'Ignite' and 'Nova' Colorways for the Embody Gaming Chair. 사진=Herman Miller Gam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산업혁명 이후 의자는 인간의 노동을 상징하는 사물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중반에 접어든 지금, 의자는 다시 ‘사라지는’ 물건이 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원격 근무 확산은 사무공간의 개념을 바꾸었다. 생산은 더 이상 고정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고정 좌석 중심의 공간은 점차 해체되고, 서서 일하거나 움직이면서 일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앉는 노동’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근로자의 38퍼센트가 ‘가변형 근무 환경’을 경험하고 있다. 이는 정해진 책상과 의자 대신 공동 사용 구역, 이동형 책상, 스탠딩 모듈 등을 사용하는 형태다. 특히 테크 산업과 창의직 종사자 사이에서는 하루 절반 이상을 서서 일하거나 걷는 형태의 업무가 일반화됐다. 의자의 역할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신체를 잠시 지탱하는 도구로 축소되고 있다.

의자의 기능 축소는 공간 구조의 전환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좌석 비율 축소’를 통해 사무공간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2024년 이후 전체 사무실 좌석의 30퍼센트를 ‘공유형 모듈’로 전환했다. 일정 시간만 사용하는 간이 좌석과 이동형 테이블이 도입되며, 고정된 개인 좌석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난다. IT기업, 디자인 스튜디오, 스타트업 등은 ‘착석 비율 50퍼센트 이하 사무실’을 운영하며, 공간의 절반 이상을 협업 존과 휴식 구역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인테리어 유행이 아니다. 앉는 시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산업 전체가 ‘착석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하루 6시간 이상 앉아 있는 생활이 조기 사망 위험을 17퍼센트 높인다고 보고했다. 근골격계 질환, 심혈관계 문제, 집중력 저하 등이 함께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무환경 디자인은 인간의 생리적 리듬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가구 산업도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의자 제조업체는 제품을 줄이기보다 ‘기능’을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서서 일하는 높이 조절형 데스크, 체중 이동을 돕는 하프 스툴, 이동형 쿠션 시트 등이 등장하며 ‘앉지 않지만 지지하는 가구’로 시장이 확장되고 있다. 일본의 코쿠요는 2024년부터 스탠딩 데스크 전용 발받침대를 개발했고, 북유럽 가구 브랜드들은 스탠드 포즈를 지원하는 하이브리드 체어 라인을 출시했다. 의자의 역할은 ‘휴식 장치’로 축소되지만, 그 기술은 여전히 인간의 균형 유지에 집중돼 있다.

한국 기업들도 변화를 수용하고 있다. 서울 도심의 한 대기업 사옥은 사무실 좌석의 절반을 없애고, 그 자리에 고정형 모니터 대신 공유 스크린을 설치했다. 한 명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서서 회의하는 구역’이 늘어났고, 회의 시간은 평균 20분 이상 단축됐다. 공간이 고정되지 않으면서 협업의 속도와 집중도가 높아진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팬데믹 이후 확산된 하이브리드 근무 체제와 결합해 ‘유동적 노동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의자의 사라짐은 디자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사무가구 디자인은 편안함보다 안정감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지금의 산업은 ‘자세의 다양성’을 중시한다. 정해진 자세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동작을 전제로 한 설계다. 이에 따라 디자이너들은 가구의 기능을 줄이는 대신 ‘움직임의 여백’을 늘리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공간은 더 비어 있고, 가구는 더 낮으며, 사용자는 더 자주 이동한다. 디자인은 인간의 신체 리듬을 공간 속에 재배치하는 과정으로 바뀌고 있다.

Herman Miller Introduces New 'Ignite' and 'Nova' Colorways for the Embody Gaming Chair. 사진=Herman Miller Gaming,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 변화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 조정이 아니라 노동문화의 인식 전환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사무실은 ‘앉아 있는 시간’으로 근무를 평가했지만, 현재의 업무 환경은 ‘성과와 몰입도’로 전환되고 있다. 시간 중심의 관리가 사라지자, 공간 중심의 디자인도 함께 해체되고 있다. ‘누가 어디에 앉아 있는가’보다 ‘무엇을 생산하는가’가 중요해진 시점에서, 의자는 자연스럽게 부차적 존재로 밀려나고 있다.

의자가 사라진 공간은 새로운 사회적 상호작용 방식을 만들어낸다. 좌석이 없는 회의실은 발언 중심의 구조를 해체하고, 이동하면서 의견을 교환하는 ‘순환 회의’ 형태로 변한다. 이는 수평적 소통 구조를 강화하며, 권위적 회의 문화의 완화를 가져온다. 의자가 사라지면서 위계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사무실 공간이 민주화되는 현상이다.

디자인 트렌드 연구기관 DMI는 2025년 보고서에서 “사무공간의 좌석 비율이 줄어들수록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 속도가 18퍼센트 향상된다”고 분석했다. 좌석의 부재는 단순한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심리적 장벽의 제거로 이어진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되 같은 위치에 머무르지 않는 구조가, 조직의 유연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착석의 종말은 또 다른 불균형을 낳고 있다. 장시간 서 있는 노동은 하지 근육 피로와 혈류 문제를 유발한다. 이에 따라 산업은 완전한 ‘무착석’보다 ‘리듬형 착석’으로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 일정 시간은 서서, 일정 시간은 기대며, 일정 시간은 앉는 순환 구조다. 이를 위해 다양한 높이 조절 장치와 유연한 구조의 가구가 개발되고 있다. ‘앉지 않는 디자인’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디자인’이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의자가 줄어든 사무실은 도시의 공간 배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업의 사무실 면적이 감소하면서, 도심 공간이 공용 스튜디오나 커뮤니티 오피스로 재편되고 있다. 건물의 한 층이 하나의 회사가 아닌 여러 조직의 활동 공간으로 분할되며, 고정 좌석 개념이 사라진 공유형 구조가 확산된다. 이는 사무 공간이 도시의 공공 자산으로 재활용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결국 의자의 소멸은 인간의 노동 방식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앉는 자세가 아닌 움직임을 전제로 한 노동 구조는 건강뿐 아니라 창의성에도 영향을 준다. 하버드 의대의 인체활동 연구에 따르면, 하루 3시간 이상 서서 일하는 사람은 앉아서 일하는 사람보다 창의적 사고 점수가 12퍼센트 높게 나타났다. 움직임이 사고의 유연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디자인의 목적이 편안함에서 ‘활동의 자극’으로 이동하고 있다.

산업 디자인의 중심이 물건에서 사람으로 옮겨간 것은 오래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전환은 더 근본적이다. 인간이 오랫동안 의자에 맞춰 몸을 바꿔 왔다면, 이제는 공간이 인간의 리듬에 맞춰 조정된다. 의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새로운 균형을 찾겠다는 시도다.

착석의 종말은 디자인의 해체가 아니라 재정의다. 의자가 사라진 공간에서 디자인은 인간의 동작을 관찰하고, 기술은 그 움직임을 기록한다. 노동, 건강, 공간, 기술이 하나의 구조로 엮이는 시점에 우리는 다시 ‘앉는 인간’을 해석해야 한다. 의자는 사라지고 있지만, 인간의 몸은 여전히 디자인의 중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