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펀드④] HEIRLOME 문화적 유산이 프리미엄을 만든다

[KtN 박채빈기자]2025년 CFDA·보그 패션 펀드 준우승 브랜드 HEIRLOME은 멕시코의 장인 기술을 현대 럭셔리 시장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통해 새로운 가치 질서를 제시했다. 대량 생산 중심의 패션 산업이 효율성을 기준 삼아 움직여온 동안, HEIRLOME은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 공예를 브랜드 경쟁력으로 전환하며 산업의 방향 전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브랜드 설립자 스테파니 수버빌은 멕시코에서 성장하며 장인 기술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전통 공예에 담긴 노동과 기술, 역사적 의미가 시장에서 경제적 보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브랜드 설립을 선택했다. 브랜드명 HEIRLOME은 기술과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승한다는 목표를 명확히 드러낸다.

HEIRLOME은 시즌마다 멕시코 각 지역 장인과 긴밀한 협업을 진행한다. 지역별 직조법, 자수 기법, 고유 색채가 담긴 소재를 현대적 테일러링과 결합하는 방식이다. 이 협력 체제는 과거 패션 업계에서 논란이 되었던 일방적 기술 차용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장인과 디자이너가 동등한 창작자로 참여하며,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창작물은 브랜드와 장인이 공동으로 기여한 결과물로 기록된다. 공정 거래와 저작권 보호가 체계적으로 반영된 구조다.

HEIRLOME의 디자인 방향은 실용성과 극적 감각을 동시에 추구한다. 남성복 기반의 구조적 디자인을 중심에 두고, 홀스헤어 보강재를 활용해 아워글라스 실루엣을 구현한다. 정제된 외형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볼륨 설계는 기술적 완성도를 기반으로 한 조형적 실험이다. 유행을 따라가는 디자인이 아니라 오래 착용할수록 품질과 완성도가 체감되는 장점이 축적되는 구조다.

제품 완성도에 대한 높은 기준 또한 브랜드 경쟁력으로 작동한다. 한 벌의 의류가 완성되기까지 100회 이상 사람의 손이 닿는다. 생산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며, 소비자는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 전승에 동참하는 행위로 인식한다. 프리미엄 시장에서 의미 소비가 확산되는 환경은 HEIRLOME이 가진 경쟁 우위를 더욱 강화시킨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HEIRLOME의 전략은 주목받고 있다. 노동 집약적 생산 방식은 단가 부담으로 이어지지만, 고품질 제품과 희소성은 충분한 가격 정당성을 만든다. 장인과의 협업은 원산지 기반 브랜딩을 강화하며, 지역 공동체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에도 직접적 기여를 한다. 패션 소비가 지역 생태계 보전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현실화되는 셈이다.

다만 HEIRLOME은 확장 단계에서 충족해야 할 조건도 존재한다. 수요 증가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정적 생산망 확보, 장인 교육 시스템 구축, 품질 유지 기준의 글로벌 표준화 등이 대표적 과제다. 성장 속도보다 정체성 보전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브랜드는 사업 확장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2025년 CVFF 준우승은 HEIRLOME이 제시한 방향성에 대한 산업계의 명확한 평가다. 지속 가능성, 문화적 정체성, 비즈니스 실행력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균형 있게 충족된 사례는 많지 않다. 팬데믹 이후 소비자 선택 기준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HEIRLOME은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 서사와 구체적 윤리성을 기반으로 시장 설득력을 갖춘 브랜드로 자리하고 있다.

문화적 유산이 단순한 장식 요소를 벗어나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핵심 가치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익명적이고 획일화된 제품보다 선명한 정체성과 인간의 손끝에서 비롯된 감성이 소비 눈높이를 결정한다. HEIRLOME은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서 전통 공예 기술이 현대 산업의 언어로 재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2025년 CVFF가 보여준 결과는 HEIRLOME의 성장 가능성뿐 아니라 세계 패션 생태계가 향해야 할 방향성까지 함께 드러낸다. 기술과 노동, 문화적 기억을 존중하는 브랜드가 글로벌 경쟁의 핵심 역할을 맡는 흐름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로 해석될 수 있다. HEIRLOME의 행보는 앞으로도 산업계의 중요한 관찰 대상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