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피카소 스케치북 한국 첫 공개

70년 전 작업실 기록, 전시 프로젝트로 부활 완성이 아닌 창작의 두뇌를 전시장으로 가져온다

2025-11-18     박준식 기자
Picasso SKETCHBOOK 최초 공개 예정, 에스티에스그룹 & 꾸바아트센터.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파블로 피카소의 이름은 미술사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피카소는 단호하고 과감한 색채로 화면을 점령하는 화가이거나 조각을 파편화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조립하는 혁명가이다. 세계 곳곳의 대형 미술관이 보유한 걸작들은 피카소를 이미 완성된 불멸의 예술가로 굳혔다. 하지만 피카소의 예술은 출발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한 줄의 선으로 시작된 생각 하나가 거대한 문명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선을 처음 스케치한 장소가 바로 피카소의 작업실이고 그 기록물이 지금 한국에서 전시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

1955년 11월 20일부터 1956년 1월 3일까지 피카소가 사용한 스케치북은 매우 얇고 단촐한 인쇄 형식의 포트폴리오다. 그러나 그 안에 남겨진 선과 형태는 단순한 드로잉으로 취급될 수 없다. 작업실에서 매일 반복된 실험과 관찰, 감정의 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피카소가 예술을 이해하고 세계를 파악한 방식이 그대로 등장한다. 이 스케치북은 1960년 파리에서 단 1천 부만 제작된 포트폴리오 에디션으로 고품질 리소그래프와 콜로타입 기법이 적용된 희귀 아카이브다. 특히 한 장은 1959년 피카소가 직접 삽입한 유일한 색채 리소그래프 페이지로, 스케치북 한 장이 유실된 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원본 스케치북의 보존을 위한 정확한 복제였던 이 에디션은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원본에 준하는 역사적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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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 기획은 에스티에스와 위대한자의 협력 아래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 미술 전시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내 관람객은 주로 완성작 중심의 피카소를 체험해 왔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완성 이전의 피카소, 덜 다듬어졌지만 더 솔직한 창작의 순간에 관객을 초대한다. 스케치북 속 기록은 거대한 기념비가 아닌 깊은 숨을 쉬는 인간 피카소의 증거다. 전시는 그 기록을 확장하고 입체화해 동시대 관객이 직접 참여하며 이해할 수 있는 체험형 공간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기록을 감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기록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방식이다.

스케치북 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자클린 로크다. 자클린은 피카소가 말년을 함께한 동반자이자 피카소의 창작을 다시 불붙인 강렬한 존재였다. 피카소는 자클린의 얼굴을 끊임없이 변형하고 분해하고 다시 구성했다. 눈동자가 과하게 늘어난 얼굴, 콧대가 인물 전체를 통제하는 듯한 구성, 입술이 작은 균열처럼 남아 있으면서 정서 전체를 지배하는 표현까지 자클린의 얼굴은 감정의 지도가 된다. 피카소는 얼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관심을 둔 적이 없다. 얼굴은 세계를 이해하고 감정을 분석하는 하나의 구조적 도구였고 스케치북 속 자클린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각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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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에는 다양한 시각적 실험이 병렬적으로 등장한다. 사람의 자세가 극단적으로 비틀리거나 신체의 비례가 과감하게 조정되며 일상의 사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갖는다. 의자, 빗, 무대, 커튼, 책과 같은 오브제들은 피카소의 손 안에서 인물과 동일한 무게를 부여받고 존재성을 가진다. 스케치북이 단지 드로잉의 묶음이 아니라 피카소의 사고 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선은 내용이 아니라 사고의 발현이며 선이 흔들릴 때 창작의 갈등이 관찰된다. 스케치북 속 한 장 한 장은 피카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 기록된 분석 데이터와도 같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리소그래프 기술에 특히 집중했다. 프랑스 파리의 무를로 인쇄소와 함께 수많은 실험을 거듭하며 드로잉을 인쇄 예술로 확장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반복 드로잉은 리소그래프의 확장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케치북의 선들이 간결하고 직설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면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념을 적는 행위에 가까웠다. 예술가가 무엇을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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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스케치북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확장이 목표다. 스케치북의 작은 페이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전체가 피카소 머릿속을 이동하는 감각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드로잉 속 선은 공간으로 뻗어나와 관객의 이동 동선을 형성할 수 있으며 특정 인물이나 사물은 설치 작품으로 재해석돼 피카소의 상상력이 공간에서 실체를 갖게 된다. 피카소가 남긴 원본 기록은 관객의 경험과 결합하며 현재형 창작으로 다시 살아난다.

진본과 복제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 또한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스케치북 에디션은 애초에 복제를 전제로 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독립된 예술 사료가 되었다. 피카소는 기술과 예술을 분리하지 않았고 복제가 예술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이해한 인물이다. 따라서 전시는 진본에 대한 경외를 유지하면서도 피카소가 남긴 예술 철학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방향으로 구성된다. 관객에게는 실물 기반 자료를 직접 마주하는 체험과 동시에 복제된 이미지가 가진 민주적 가치를 함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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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감상은 시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관람객의 참여 방식에 따라 변화한다. 피카소 스케치북 전시가 중요한 이유는 피카소의 창작 방법을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해 관람객 앞에 놓기 때문이다. 전시 기획자 위대한자는 스케치북이 과거의 기록으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창작의 출발점이 되도록 확장할 계획임을 밝혔다. 에스티에스는 문화 기획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이 귀중한 아카이브를 결과 중심의 전시가 아닌 과정 중심의 체험형 전시로 구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관객은 이 전시를 통해 피카소가 탁월한 천재로 기억되기 이전의 창작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은 일상 속에서 오랜 생각과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 거대한 걸작도 스케치북 속 흔들리는 선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눈앞에서 경험한다. 스케치북은 완전히 정리된 미학이 아니라 여전히 숨 쉬는 현장이다. 한국에서 펼쳐질 이번 전시는 그 현장을 2026년의 관객에게 다시 열어주는 중요한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