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 INSIGHT⑤] 상실을 기록한 증거

인장이 증명한 폭력, 침탈, 생존의 근현대사

2025-11-25     박준식 기자
이재인 명예교수 헌정 인장.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근현대 한국 사회에서 인장은 단순한 행정 도구를 넘어 인간 존엄과 국가 정체성의 침탈, 그리고 생존을 증명하는 실질적 사료로 기능해왔다. 인장은 삶의 기록을 남긴 도구이면서 동시에 상실을 증명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강제 점령, 전쟁, 이산, 국가 폭력, 제도적 배제 속에서 인장은 지워진 존재를 확인하게 한 마지막 기록 장치였다. 인장은 폭력에 의해 상실된 권리, 압탈된 삶, 감춰진 고통을 정확하게 남겼다.

일제강점기에 인장은 지배 체제 유지 수단으로 통제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인장 등록과 제작 허가를 통해 한반도 주민을 통제 체계로 편입했다. 통행증과 거주 허가, 면허 발급 등의 행정 절차 전체가 인장 날인 상태로 관리되었다. 통치 권력은 인장 기재 사항을 관리하며 조세, 병력, 물자까지 통제했다. 인장은 권리 보장 수단이 아닌 감시 장치로 재편되었다. 동일한 기술이 구조적 억압에 동원된 사례다.

인장은 무력으로 빼앗긴 정체성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독립운동가, 저항 세력 구성원은 생존 과정에서 인장을 잃거나 파기해야 했다. 실명 기반 인장은 생명 위협과 직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익명화 과정에서 제거 대상이 되었다. 이름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 인장은 존재의 표식을 상실한 채 잠복된 역사의 지층 속에 머물렀다. 그 결과 수많은 기록은 확인 불가능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의 인장은 인권 침해의 가장 직접적 증거다. 피해자 생존 기록에 포함된 인장 자료는 강제 노역 이후 사회 복귀 과정에서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재확립하기 위한 행정 절차에 사용되었다. 이름 삭제, 가족 해체, 행정 기록 부재 속에서 인장은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사법적 장치였다. 서류에 남은 인장 압인은 피해자의 존재가 기록 속에서 소멸하지 않도록 지탱한 근거였다. 인장은 피해 사실의 부인 가능성을 차단하는 물리적 증명 도구다.

한국전쟁 시기 인장은 생존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 가까웠다. 피란 과정에서 인장을 지닌 사람은 행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물적 배급 체계에서 최소한의 참여가 가능했다. 가족과 떨어진 상황에서 인장 날인이 포함된 문서가 혈연 관계의 추후 확인 근거가 되었다. 실종자, 전사자, 이산가족 발생 시에도 인장은 신분 확인 사료로 활용되었다. 인장은 생존 여부와 제도권 접근 권리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도 인장은 사회 복귀 절차에서 필수 요소였다. 귀환민 등록, 주거 재배정, 산업 노동 배치 등 모든 영역에서 인장 날인 절차가 적용되었다.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편입되기 위해서는 존재를 증명해야 했고, 그 증명은 인장으로 확인되었다. 상실에서 회복으로 이동하는 과정 전체에서 인장은 제도적 복원을 이행한 기록이다.

이재인 명예교수 헌정 인장.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독재 정권 시기 인장은 국가 폭력 정당화 장치로 이용되기도 했다. 행정 문서 조작, 강압적 서약, 부당한 처벌 기록 등이 인장 날인으로 확정되었다. 제도권 권력이 인장을 통해 위법적 조치를 합법적 형식으로 전환했다. 인장은 통치 권력이 남긴 흔적을 날것 그대로 보존하는 증거 자료이기도 하다.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 문서에서 인장 확인은 국가 폭력의 실체를 입증하는 주요 근거로 기능한다.

노동 현장에서도 인장은 생계 권리 증거로 남았다. 산업화 시기 노동 계약 문서가 인장 압인 상태로 보존되면서 임금 갈등, 부당 해고 문제 해결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인장은 경제적 약자에게 법적 보호를 제공한 실증 수단이었다. 정보 비대칭 구조에서 인장은 계약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인장은 생계 기반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적 방패였다.

이산가족 문제 역시 인장과 깊게 연결된다. 가족 구성원 재회 과정에서 혈연과 신분을 확인할 유일한 사료가 인장이 찍힌 문서인 경우가 많았다. 호적, 혼인 신고, 재산 소유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인장은 복합적 사실 확인 구조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했다. 사람의 이름이 오랜 시간 공백기를 거친 뒤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장이 남긴 비가역적 흔적 때문이다.

인장은 폭력과 상실의 시대에 기록과 증명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문화 도구였다. 인간의 기본 권리가 제도적으로 무시되는 상황에서도 인장은 사회가 존재를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든 실물 증거였다. 인장은 역사가 은폐를 시도하더라도 현실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실을 남겼다.

한서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된 인장 유물 중 일부는 피해자, 서민, 생존자의 사회 편입 기록을 보여준다. 문학계 유명 인사뿐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진 다수의 구성원이 남긴 인장은 사회 구조를 안정적으로 지탱한 기반이었다. 기증 유물 중 민간 인장 다수는 상실과 회복이 교차한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인장은 침묵으로 남은 역사의 목소리를 다시 읽게 만든 실물 자료다.

근현대 한국사에서 인장은 국가 폭력의 증거이며, 법적 회복의 사료이며, 생존의 기록이며, 정체성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인장은 역사적 사실의 은폐를 허용하지 않았고, 인권 침해를 제도적 관점에서 되짚게 만든 실체적 증명이다. 사회의 구조적 약자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던 제도가 시간이 지난 뒤라도 피해를 확인하고 복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록은 사실을 보존하고, 인장은 기록의 효력을 확정한다. 존재가 사라져도 이름은 남는다. 인장은 이름이 부정되어도 존재가 소멸하지 않도록 한다. 인장은 근대사를 관통한 생존의 흔적이다. 누락의 역사 속에서 인장은 삭제되지 않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