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트렌드①] 필립스가 말해준 현실, 아트마켓은 이미 방향을 바꿨다
과열의 끝. 거래는 줄었지만 정확하게 팔렸다
[KtN 임민정기자]뉴욕 봄 경매 주간은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연이어 대형 거래를 터뜨리며 시작되었다. 크리스티는 안정감 있는 블루칩 중심으로 입찰 열기를 끌어올렸고, 소더비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2억 3천만 달러가 넘는 값에 판매하며 기록적 매각을 이끌어냈다. 시장이 살아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미술 시장의 실제 흐름을 읽기 위해서는 화려한 헤드라인보다 내부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바로 그 단서를 필립스가 제공했다.
필립스는 33점이라는 소규모 로트로 6천7백30만 달러를 만들었다. 세일 규모만 보면 크리스티와 소더비에 비해 작다. 그러나 숫자의 방향성은 다르게 읽힌다. 전년 동기 대비 24.4퍼센트 증가했고, 판매율은 94퍼센트에 달했다. 판매가 이루어진 작품들의 가치 기준 소화율은 97퍼센트였다. 성적을 판단하는 핵심은 추정가 대비 결과다. 필립스는 예상을 정확히 맞췄다. 사전 추정 하단인 4천8백30만 달러를 뛰어넘어 5천4백80만 달러 해머를 확보했고, 수수료를 포함한 최종 금액은 추정 상단에 근접했다. 이는 시장이 제시한 가격을 투자자와 컬렉터가 설득력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거래량은 줄었지만 흐름은 명확하다. 과열기가 끝나고 정상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시장은 과거처럼 무리하게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 필립스는 볼륨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많이”가 아니라 “맞게”. 수요를 정확히 겨냥하는 경매가 무엇인지 보여준 밤이었다.
이번 세일에서 자본이 향한 방향은 더욱 분명했다. 자산 흐름은 검증된 블루칩, 특히 기관 지지 기반 작가에게 몰렸다. 조안 미첼과 루스 아사와는 그 변화를 그대로 드러냈다. 미첼의 작품은 2018년 크리스티에서 9백10만 달러였으나 이번에 1천4백30만 달러를 기록했다. 상승률만으로는 평이하지만, 이 결과의 의미는 단순 가격 이상이다.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가 에스테이트를 잡고 뉴욕에서 전시를 연 직후 일어난 현상이다. 미술관 전시, 갤러리 전략, 옥션 레퍼런스가 서로를 견인하며 가격을 구성하는 ‘인스티튜셔널 스택’이 완성된 대표 신호다.
루스 아사와의 두 점 역시 각각 추정 상단을 넘어 1백1만 달러, 90만 달러에 거래됐다. 아사와 역시 즈워너가 에스테이트 관리를 맡고 있다. 제도권 지원과 시장 가격이 결합하는 구조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미술관 가시성, 갤러리 보호막, 공급 희소성이 동시에 뒷받침되는 작가군이 안전자산 역할을 하고 있다.
시장의 맨 위에 서 있는 거장 작가의 움직임에서는 두 가지 메시지가 동시에 나타났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은 이번 세일 최고가인 1천6백만 달러에 낙찰되었으나, 이전 거래 이력과 비교하면 손실이었다. 중국 컬렉터 장창이 2015년 1천2백20만 파운드(당시 약 1천9백20만 달러)에 사들인 작품이다. 파운드 가치 변동과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실질 가격 하락폭은 더 크다. 이는 블루칩조차 시장 상승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다. 한때의 고점 매입은 10년 뒤 수익이 아닌 손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시장 교훈이 선명해졌다. 시장 균열은 최상단에서도 시작된다.
반면 막스 에른스트는 40만 달러 로우 추정가에서 1백50만 달러까지 상승하며 과소평가된 모던 조각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트마켓이 블루칩 안에서도 세대와 포맷별 재배치를 시작했다는 징후다.
한편 필립스가 한때 강점을 보였던 신진 작가 섹션은 확연히 위축되었다. 영국의 주목받는 페인터 자데 파도주티미의 작품은 추정가 80만~1백20만 달러였으나 유찰됐다. 투기적 수요가 빠지자 단기 부상 작가들의 옥션 체력이 크게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스타는 나오지 않았다. 단 한 명, 파이어레이 바에스만이 64만5천 달러에 개인 최고가를 기록했다. 시장은 검증되지 않은 스피드로 번쩍이는 이름보다 오래 쌓여온 신뢰를 선택하고 있다.
이번 세일의 또 다른 중요한 전환은 경매 방식이다. 필립스는 하우스 보증을 지양하고 3자 보증에 의존했다. 하우스 보증이란 경매사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구조지만 위험 부담이 크다. 대신 3자 보증은 외부 자본이 가격을 방어해준다. 이 방식은 경매사가 직접 리스크를 떠안지 않으면서도 고가 로트를 유치할 수 있게 한다. 전체 로우 에스티메이트의 57.3퍼센트를 3자 보증이 커버했다. 슬림한 로트 구성과 함께 위험을 철저히 외부화한 전략이다.
경매는 더 이상 단순한 중개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구조화된 금융 상품에 가까워지고 있다. 보증은 일종의 옵션 계약이며, 리스크 분산은 포트폴리오 조정이다. 경매사가 자신을 플랫폼이 아닌 금융 오케스트레이터로 재정의하려는 흐름이 담겨 있다. 필립스는 규모 경쟁 대신 생존력 높은 비즈니스 모델을 선택했다.
여기에 새로운 수집 형태가 진지하게 시험대에 올랐다. 필립스는 자연사 기반의 오브제를 이브닝 세일에 포함시켰다. 어린 트리케라톱스 골격은 예상가를 크게 넘는 5백4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1억 8천만 년 전 해양 악어 화석도 77만4천 달러에 팔렸다. 화석의 등장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다. 희소성과 이야기, 대중적 관심, 전시 활용 가능성이 결합된 영역이다. 테크 부자와 경험 소비 세대라는 새로운 컬렉터층이 주도하는 시장의 신호다. 다만 자연사 자산은 문화재법, 출토지 규제, 윤리 논쟁이 얽혀 있어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높은 수익 가능성과 함께 높은 정책 위험이 따라온다. 그럼에도 필립스가 이 카테고리를 전면에 배치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술 시장 외연 확장에 대한 실험이 본격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필립스 이브닝 세일은 하나의 전환점이다. 거품을 뺀 뒤, 시장의 기초 체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보여주었다. 미술 시장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볼륨은 줄었고, 품질과 효율은 올라갔다. 안전자산 역할을 할 작가군이 재편되고 있다. 고가 시장에서도 리스크 현실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새로운 자산군의 편입이 시장 확장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미술 시장은 더 이상 과열의 온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조정기를 거치며 신뢰 가능성과 지속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구조로 넘어가고 있다. 눈에 띄는 숫자의 폭발이 아니라, 방향의 명확화가 중요한 시점이다. 필립스는 그 방향을 냉정하게 말해준 경매였다. 시장은 이미 멈추지 않는다. 방향만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