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사는 서학개미, 지갑 비는 서민… '고환율 청구서'는 자영업자에게
'환전 한 번에 멘붕'…1,500원 근접한 원·달러 고환율에 여행객·자영업자·해외근로자 모두 타격 경상흑자에도 돈은 해외로…직접·증권투자 810억달러 유출 정부·국민연금까지 비상 대응…환율 방어보다 구조 개편이 관건
[KtN 박채빈기자]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후반을 오르내리며 높은 수준을 이어가자 동남아 여행객부터 해외 근로자, 자영업자까지 일상에서 '고환율 경기 침체'를 체감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해외 직접투자와 해외 증권투자가 크게 늘면서 자본·금융계정에서 외화가 빠져나가고 있어 단순한 강달러를 넘어 '자본 유출형 원화 약세'라는 구조적 구도가 뚜렷해지고 있다.
공항선 1달러 1535원…연말 여행객 '멘붕'
연말 다낭 가족여행을 준비하던 40대 직장인에게는 베트남 동 환율 체크가 하루 일과가 됐다. 석 달 전만 해도 베트남 화폐 100동당 환율이 5원대 초반이었지만 최근 5원대 중반까지 올라, 현지 경비 300만원만 놓고 봐도 수십만원의 추가 지출이 불가피해진 탓이다.
이렇게 출발 전부터 지갑이 얇아진 상태에서 관광객이 느끼는 체감 환율 충격은 공항 창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2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1,472.4원에 마감했을 때 공항 현장 매도 환율은 1,535원까지 오르며 100달러를 사는 데 15만3,500원을 지불해야 했다. 불과 얼마 전 1,400원대 초반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100달러당 1만3,500원이 더 드는 셈으로 이제는 해외여행 한 번이 아니라 '환전 한 번'만으로도 가계 지출 구조가 흔들리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경상 흑자 속 환율 고공행진…해외투자가 다 가져갔다
11월 들어 이번 고환율 국면의 특징은 원화 가치 하락 폭이 다른 아시아 통화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같은 기간 달러 인덱스가 99.87에서 100 안팎으로 소폭 오르는 데 그친 사이, 대만달러·싱가포르달러·인도네시아 루피아·베트남 동·태국 바트·필리핀 페소도 모두 달러 대비 약세를 보였지만 낙폭은 원화보다 작았다. 말레이시아 링깃은 오히려 달러 대비 강세를 보이며 대조를 이뤘다.
표면적으로는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가 커지며 달러 강세는 한풀 꺾였지만, 11월 말 현재 원·달러 환율은 여전히 1,470원 안팎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출 호조에도 환율이 쉽게 내려오지 않는 배경에는 해외 직접투자와 해외 증권투자 확대가 만든 구조적 달러 수급 불균형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은행 집계에 따르면 올해 1~9월 경상수지가 827억7,000만달러(약 121조 원) 흑자를 냈지만, 같은 기간 직접투자 206억달러(약 30조 원), 증권투자 603억9,000만달러(약 88조 원) 등 810억달러(약 119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고환율 시대'의 진짜 패자는 누구인가
문제는 이런 자본 이동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해외 주식·채권 등 위험 자산에 대한 '서학개미' 선호가 여전한 데다, 기업들의 해외 생산기지·M&A 확대까지 겹치면서 달러에 대한 상시적 매수 수요가 굳어지고 있다. 이처럼 일시적이 아닌 꾸준한, 이른바 '시장 바닥에 깔린 달러 매수 수요'가 유지되면 특별한 악재가 없어도 원·달러 환율이 쉽게 내려가지 못하고 높은 수준에서 버티게 된다.
이런 구조를 두고 우리은행 연구원은 현재 환율 수준을 '롱(달러 매수) 포지션 과열로 환율 상단이 높아진 상태'라고 진단한다.
개인과 기관이 동시에 달러 강세 흐름에 올라타는 '달러 편승'을 선택하면서, 그 부담은 곧바로 실물 경제로 전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환율의 비용은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정면으로 맞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일하는 해외 근로자는 "달러가 1,300원대에서 1,500원대로 오르면서 생활이 버티기 어려워졌다"고 호소하고, 수입 원자재에 크게 의존하는 자영업자는 원가 급등과 소비 위축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고환율 경기 침체'가 통계 지표보다 먼저 가계와 영세 사업자의 현금 흐름에서 현실로 드러나는 시점이다.
국민연금까지 꺼낸 정부…'방어선' 보일까
정부와 외환당국이 고환율 장기화로 인한 금융 불안을 막기 위해 비상 대응에 나섰다.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한국은행, 국민연금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를 가동하며 시장 안정 메시지를 내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의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해, 미리 정한 환율로 거래하는 계약 등을 활용하는 '전략적 환헤지'와 '해외투자 조정'을 통해 환율 급등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이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환율 안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해외투자에 크게 의존하는 외환 수급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정책 개입의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KtN 리포트
시장에서는 이미 환율의 '새 정상값'이 1,400원대로 굳어지고 1,500원 선까지 위협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예전처럼 일시적 급등이 아닌 고환율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구조적 변화의 초입에 와 있다는 뜻이다.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는 소비자에게는 항공권과 숙소 비용뿐 아니라 환율이 사실상 '체감 기준금리'처럼 작용하고, 공항 환전 창구 앞의 긴 줄과 늘어나는 '환전 포기'는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과 피로감을 그대로 비춘다.
환율은 지금 수출·내수·가계부채·연금 수익률 등 한국 경제의 체력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전방위로 시험하는 질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