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정치⑤ ]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관계였다

김장 행사로 드러난 한국형 문화 외교의 작동 방식

2025-12-14     박준식 기자
김혜경 여사, 주한대사 배우자 초청 김장 행사.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김혜경 여사가 주한 외국 대사 배우자들을 초청해 진행한 김장 행사는 K 푸드를 알리는 홍보 일정으로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대통령실 서면브리핑의 내용과 현장의 구성 방식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중심에는 음식이 아니라 관계가 놓여 있었다. 김치의 맛이나 조리법보다 김장이 형성하는 사회적 과정이 전면에 배치됐고, 문화 외교의 방식 역시 결과물의 전시에 머물지 않았다. 함께 만들고 시간을 공유하는 장면 자체가 외교의 언어로 작동했다.

행사가 열린 공간은 한식문화공간 이음이었다. 이 장소 선택은 의미가 분명했다. 공식 만찬장이 아니라 체험과 조리가 가능한 생활 공간이었다. 참석자들은 관람객이 아니라 참여자로 배치됐다. 이하연 김치명인의 안내 아래 배추에 소를 넣고 양념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이어졌고, 각국의 식문화에 맞춰 채식과 할랄 등 다양한 방식의 김장이 함께 진행됐다. 김장은 완성품을 보여주는 행사가 아니라 협업과 조정의 과정이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김혜경 여사가 강조한 대목도 김치 자체가 아니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상이 김치가 아니라 김장이라는 설명은 방향을 분명히 했다. 김장은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시간을 들이는 문화이며, 각자의 역할이 엮여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는 공동의 작업이라는 인식이다. 이 설명은 한국 음식 문화를 특정한 맛의 우수성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김혜경 여사, 주한대사 배우자 초청 김장 행사.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문화의 변형을 허용하는 태도다. 참석자들은 각자의 종교와 식습관에 맞게 재료를 선택했고, 김장 방식 역시 일률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다. 김혜경 여사는 다양한 김치를 소개하며 백김치, 갓김치, 파김치, 동치미 등 여러 갈래의 전통을 함께 언급했다.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공존의 방식을 보여주는 구성이다. 한국 문화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정되는 구조라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전달됐다.

시식 자리에서도 강조점은 비슷했다. 김치와 함께 제공된 음식들은 김장 문화가 일상 식탁과 분리된 의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어지는 관습임을 보여준다. 참석자들이 느낀 소회 역시 맛의 평가보다는 함께 만든 경험에 집중됐다.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같은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중심에 놓였다. 김장은 이 자리에서 외교적 이벤트가 아니라 사회적 장치로 기능했다.

문화 외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방식은 전통적인 국가 홍보와 거리를 둔다. 성과를 강조하거나 국격을 드러내는 연출은 최소화됐다. 대신 과정이 공개되고 참여가 중심이 됐다. 한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고, 함께 변형되고 공유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하는 접근이다. 문화가 타자에게 주입되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임을 드러낸 셈이다.

김혜경 여사의 발언에서도 같은 기조가 이어졌다. 김장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는 개인적 경험을 언급했지만, 개인의 취향이나 가정사에 머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김치의 맛이 깊어진다는 표현은 문화가 축적과 시간을 통해 완성된다는 인식으로 확장됐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르익어 간다는 설명 역시 관계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읽힌다.

김혜경 여사, 주한대사 배우자 초청 김장 행사.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 행사는 문화 외교에서 흔히 요구되는 성과 지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당장의 수출 성과나 브랜드 인지도 상승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관계 형성과 신뢰 축적이라는 장기적 효과를 겨냥한다. 김장은 빠른 속도로 결과를 내기 어렵다. 시간이 필요하고 반복이 필요하다. 이 속성은 외교의 현실과 닮아 있다. 신뢰는 한 번의 이벤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참석자 구성이다. 외국 대사 본인이 아니라 배우자들이 초청됐다. 이는 외교의 무대를 공식 협상에서 생활 문화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선택이다. 배우자 외교는 오랫동안 비공식적 영역으로 취급돼 왔지만, 실제로는 문화 교류와 관계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김장 행사는 이 비공식 영역을 전면에 드러내며 문화 외교의 실질적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이 일정은 한국 문화를 소비 가능한 콘텐츠로 포장하지 않는다. 체험은 있었지만 관광 상품화의 문법은 배제됐다. 대신 노동과 시간, 조율의 과정을 그대로 노출했다. 문화가 쉽게 소비될수록 의미는 얕아진다. 김장 행사는 이 점을 의식적으로 피해 간다. 불편함과 서툼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도록 설계됐다.

김혜경 여사, 주한대사 배우자 초청 김장 행사.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정치적 메시지 역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선언이나 구호 대신 장면이 앞섰다.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같은 작업을 하는 모습은 말보다 많은 것을 전달한다. 문화 외교가 성공하려면 설명보다 경험이 앞서야 한다는 원칙이 이 자리에서 구현됐다.

이 행사는 한국 문화가 무엇을 중시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완성보다 과정, 속도보다 시간, 결과보다 관계다. 김장은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식을 집약한 문화적 장치이며, 외교의 장에서도 그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한국형 문화 외교는 화려한 전시가 아니라 생활의 구조를 공유하는 데서 힘을 얻는다.

김혜경 여사의 김장 행사는 문화 외교를 새로운 방향으로 밀어 올렸다. 문화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이 공적 장면에서 구현됐다. 음식은 매개였고, 핵심은 관계였다. 이 관계가 축적될수록 외교의 언어는 부드러워지고 지속성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