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③] 피카소 스케치북 속 유일한 색
1955년의 연필과 1959년의 리소그래프가 만난 구조
[KtN 박준식기자]피카소 스케치북에서 가장 분명하게 구분되는 장면은 단 한 장이다. 전체가 연필 드로잉으로 구성된 기록물 안에 오직 하나의 컬러 이미지가 삽입돼 있다. 해당 이미지는 1959년 파리에서 제작된 컬러 리소그래프이며, 피카소가 직접 스케치북에 끼워 넣은 작업이다. 설명 문서에 따르면 이 리소그래프는 원본 스케치북에서 유실된 한 페이지를 대체하기 위해 제작됐다. 장식이나 변주가 아니라 기록의 완결을 위한 조치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스케치북이 단순한 작업 노트가 아니라 관리되고 판단된 기록물이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연필 드로잉으로 채워진 1955년 겨울의 기록과, 1959년에 제작된 컬러 리소그래프가 한 권 안에서 공존하는 구조는 시간의 층위를 형성한다. 스케치북은 통상 하나의 시점에 묶인 기록물로 인식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피카소는 과거의 기록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사라진 부분을 새로운 작업으로 보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선택은 기록의 완결성을 우선한 결정이다. 훼손된 상태를 남기기보다 구조를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자기 아카이브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리소그래프라는 매체 선택 역시 우연이 아니다. 피카소는 1955년 전후로 리소그래프 작업에 집중했다. 프린터 페르낭 무를로와의 협업을 통해 리소그래프를 단순한 복제 수단이 아닌 독립적 창작 매체로 끌어올렸다. 설명 문서에서도 이 시기를 판화 활동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로 명시하고 있다. 사진 이미지를 참고하기도 했으나, 핵심은 매체에 대한 통제력과 기술적 숙련이었다. 스케치북 속 유일한 컬러 페이지는 이러한 판화 실험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연필 드로잉과 리소그래프 사이에는 성격 차이가 분명하다. 연필은 즉각적이고 수정이 가능하며, 사고의 이동을 기록하는 도구다. 반면 리소그래프는 제작 과정이 복잡하고 결과가 확정적이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유실된 페이지를 연필 드로잉으로 다시 채우지 않았다. 판화 작업을 선택했다. 이 결정은 스케치북을 여전히 작업 중인 노트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기록 단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흥의 흔적 대신 확정된 이미지를 삽입했다는 점에서 기록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이 컬러 리소그래프는 크기 역시 의미를 지닌다. 원본 크기는 11과 4분의 1인치 곱하기 8과 2분의 1인치이며, 스케치북에는 축소된 형태로 삽입되고 별도의 풀사이즈 플레이트로도 제공된다. 이 구성은 해당 이미지가 단순한 보충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감상과 분석의 대상으로 설정됐음을 의미한다. 설명 문서에서 크기와 재현 방식을 명확히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케치북의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해당 장면의 성격을 분리해 인식하도록 설계했다.
색의 등장은 스케치북 전체의 인상을 바꾼다. 흑백의 사고 흐름 속에서 컬러 리소그래프는 하나의 기준점처럼 작동한다. 색은 장식이 아니라 매체 전환의 표식이다. 피카소는 색을 통해 회화적 감각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판화라는 기술적 영역을 다시 호출했다. 스케치북이라는 형식 안에서 서로 다른 매체가 충돌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점은 피카소 작업 방식의 핵심을 보여준다. 매체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사고 체계 안에서 기능한다.
보존의 관점에서도 이 선택은 중요하다. 미술사에서 스케치북은 종종 분해되거나 페이지 단위로 유통되며 원래 구조를 잃는다. 그러나 이 스케치북은 페이지 순서와 구성을 유지한 채 출판됐다. 유실된 한 장을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한 행위는 구조 보존을 위한 조치였다. 스케치북을 사적인 메모가 아니라 공적인 기록으로 다뤘다는 점이 이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1959년이라는 시점 또한 중요하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국제적 명성과 영향력을 이미 확보한 이후다. 그럼에도 과거의 스케치북을 다시 검토하고 결손을 보완하는 데 직접 개입했다. 회고적 정리라기보다 기록의 완성에 대한 책임 의식에 가까운 행위다. 말이나 선언이 아니라 물리적 조치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크다.
스케치북 전체를 놓고 보면 컬러 리소그래프는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필 드로잉의 연속성을 다른 각도에서 확장한다. 드로잉이 사고의 이동을 기록했다면, 리소그래프는 그 사고가 다른 매체에서 어떻게 고정되는지를 보여준다. 즉흥과 확정, 실험과 결과가 한 권 안에서 병렬적으로 존재한다. 이 구조는 피카소 예술을 단일한 스타일이나 단일한 매체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동시에 복합성이 어떻게 관리되고 유지됐는지 설명하는 구체적 근거를 제공한다.
스케치북 속 유일한 컬러 리소그래프는 결손을 채운 이미지가 아니다. 피카소가 자신의 기록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연필로 시작된 사고는 판화로 이어졌고, 판화는 다시 스케치북이라는 기록 안으로 돌아왔다. 매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사고는 지속적으로 이동한다는 피카소 작업 방식의 핵심이 이 한 장에 응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