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상 리포트①] 무너진 자유무역의 약속, 균형무역이 새 기준이 되는 순간
전후 통상 질서의 결함을 짚은 라이트하이저의 진단 만성 흑자와 만성 적자 구조, 무역의 언어가 경제안보로 이동한다 AI와 데이터 시대, 기업 전략을 다시 쓰게 만든 통상 패러다임 전환
[KtN 박채빈기자]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글로벌 컨설팅사 McKinsey & Company 와의 인터뷰에서 전후 국제 무역 시스템이 더 이상 설계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무역 자체가 실패했다기보다, 자유무역이 만들어낸 결과가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고 있다는 진단에 가깝다. 일부 국가는 구조적으로 흑자를 누적하고, 다른 국가는 구조적으로 적자를 감내하는 상태가 수십 년간 고착됐으며, 이런 불균형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인식이 전제에 놓여 있다.
라이트하이저가 문제 삼는 지점은 ‘무역의 양’이 아니라 ‘무역의 구조’다. 교역 규모가 커졌다는 사실만으로 시스템의 건강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흑자국과 지속적인 적자국이 공존하는 체계는 정상적인 순환 구조가 아니며, 결국 한쪽의 산업 기반과 사회 구조를 잠식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균형은 이상론이 아니라 시스템 유지의 최소 조건이라는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통상 담론의 방향은 분명히 바뀐다. 과거 무역 논의가 효율성과 가격 경쟁력, 소비자 후생을 중심으로 구성됐다면, 라이트하이저의 진단은 산업 구조와 노동시장, 국가 운영 능력으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값싼 수입품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조 기반이 붕괴되면 중산층 일자리가 사라지고, 지역 경제가 약화되며, 국가는 재정과 안보 모두에서 취약해진다. 균형무역은 보호주의적 구호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된다.
미국과 유럽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간 누적된 구조적 결과이며, 그 적자가 특정 국가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여기서 균형 논의는 단순한 관세 문제를 넘어 통화 체계, 조세 구조, 노동 규제, 환경 기준까지 포괄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무역수지는 개별 기업의 경쟁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가가 선택한 제도와 정책의 묶음이 결과를 만든다는 인식이 자리한다.
이런 시각은 세계무역기구 체제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관세 중심의 규범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실제 무역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는 관세 밖에 있다는 판단이다. 노동법과 환경 규제, 환율 운용, 조세 정책 같은 요소들이 경쟁력을 결정하는데, 이런 요소는 협상 테이블에서 간단히 조정하기 어렵다. 한 번 손을 대더라도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규범의 구속력이 약해질수록 힘과 산업정책의 비중이 커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라이트하이저는 많은 무역 불균형이 시장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산업정책의 결과라고 본다. 특정 국가가 보조금과 규제, 세제 설계를 통해 구조적 우위를 확보했다면, 다른 국가는 이를 중화할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다. 이때 관세는 응징 수단이 아니라 조정 장치로 기능한다. 통상은 중립적인 교환 규칙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통상 패러다임 전환이 2026년을 앞둔 시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AI와 데이터 때문이다. 라이트하이저의 인식에서 기술과 데이터는 더 이상 개별 기업의 사적 자산이 아니다. 국가가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전략 자산으로 이동했다. 희토류와 같은 자원이 정책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현실로 확인됐다. 반도체, 클라우드 인프라, AI 학습 데이터와 모델 운영 체계 역시 같은 범주로 편입되고 있다. 기술 공급망의 취약 지점은 곧 AI 공급망의 취약 지점으로 이어진다.
이 환경에서 기업 경영의 기준도 달라진다. 비용 최소화라는 단선적 목표는 설득력을 잃는다. 대신 중단 없는 운영, 규범 리스크 회피, 정책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핵심 지표로 부상한다. 라이트하이저가 기업 이사회에 제시한 조언은 단순하다. 통상 규제가 사업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려면 소비자 기반 가까이에 제조 거점을 두라는 것이다. 지정학과 규범 리스크가 상시화된 환경에서 소비지 인접 생산은 비용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에 가깝다.
공급망을 짧게 만드는 선택은 단기적으로 생산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관세와 비관세 장벽, 탄소 규제, 원산지 추적 기술이 결합된 환경에서는 단가 경쟁만으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규범을 통과하는 능력, 공급을 멈추지 않는 능력, 데이터와 기술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능력에서 갈린다. 균형무역의 귀환은 세계화의 종말이 아니라 세계화의 구조적 전환을 의미한다.
연결은 유지된다. 다만 단일한 흐름이 아니라 복수의 경로로 나뉜다. 국경을 닫는 세계가 아니라, 규범을 통해 흐름이 재배치되는 세계다. 기업은 시장만을 바라보던 시기에서 규칙과 정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 시기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게 이 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 유럽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가치사슬 구조에서 규범의 파편화는 비용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 된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처럼 기술과 안보가 겹치는 산업은 통상 질서의 중심에 놓인다. 제조 거점의 분산, 데이터 운영 구조의 분리, 원산지 증빙의 고도화는 예외적 대응이 아니라 기본 전략이 된다.
AI 시대를 설명하는 ‘HORSE POWER’라는 키워드는 이 지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힘, 자동화가 아니라 판단과 책임의 위치가 중요해진다. 통상 패러다임의 전환은 기술 발전을 막는 장벽이 아니라, 기술이 작동하는 조건을 다시 쓰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