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상 리포트④] 보이지 않는 관세, 원산지와 추적 기술이 무역을 다시 쓴다

트랜십먼트의 종말, 제3국 경유 수출이 막히는 구조 관세보다 강력한 규제, 원산지와 데이터의 결합 공급망은 이제 ‘이동 경로’가 아니라 ‘증명 체계’의 문제다

2025-12-19     박채빈 기자
통상·산업 대전환- 리쇼어링, 디커플링, 제로클릭 시대의 생존 공식.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사진=McKinsey & Company 영상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채빈기자]무역 환경이 바뀌고 있다. 관세율이 오르내리는 표면 아래에서 더 강력한 규제가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관세다. 핵심은 원산지와 추적이다. 어디서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경로를 거쳐 왔는가가 무역의 성패를 가른다.

그동안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 생산을 유지하면서 제3국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통상 리스크를 관리해 왔다. 베트남과 태국, 말레이시아, 멕시코는 대표적인 경유지였다. 부품을 중국에서 생산해 제3국에서 조립하거나 일부 공정을 거친 뒤 원산지를 바꿔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오랫동안 관행처럼 작동했다.

그러나 이 관행이 흔들리고 있다. 통상 당국의 시선은 더 이상 최종 조립지에 머물지 않는다. 부품의 출처와 공정의 실질성, 부가가치의 비중까지 들여다본다. 원산지는 신고 항목이 아니라 검증 대상이 됐다. 트랜십먼트는 회피 전략이 아니라 규제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기술이 있다. 물류 데이터와 통관 정보, 생산 공정 기록이 디지털화되면서 원산지 추적은 정교해졌다. 블록체인과 데이터 분석 기술은 부품 이동 경로를 되짚는 데 활용되고, 관세 당국은 과거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의심 거래를 가려낼 수 있게 됐다. 통상 규제는 더 이상 사람의 판단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관세의 성격도 달라진다. 명시적인 고율 관세보다 원산지 규정 위반에 따른 차단과 벌칙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통관 지연과 재검사, 과징금과 거래 중단은 기업의 비용 구조를 단번에 흔든다. 관세는 숫자로 계산되지만, 보이지 않는 관세는 불확실성으로 작동한다.

기업 입장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전략의 방향이다.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복잡한 경로를 설계하던 방식은 위험 자산이 됐다. 단기 비용 절감이 장기 리스크로 돌아오는 구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경로의 단순화와 투명성이다. 어디서 만들었는지를 숨기는 전략이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구조가 경쟁력이 된다.

한국 기업 역시 이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중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동남아에서 조립해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는 구조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특히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부품처럼 전략 산업으로 분류된 품목은 규제 강도가 더 높다. 원산지 기준은 점점 엄격해지고, 예외는 줄어든다.

이런 환경에서 공급망은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가 된다. 생산 거점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정의 실질성과 부가가치 비중을 재구성해야 한다. 단순 조립을 넘어 핵심 공정을 어디에 둘 것인가, 기술과 데이터가 어느 단계에서 결합되는지가 중요해진다.

보이지 않는 관세는 또한 기업 내부의 관리 체계를 바꾼다. 원산지 증빙은 더 이상 통관 부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다. 생산과 물류, 재무와 법무, IT 시스템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가 연결되지 않으면 증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통상 리스크 관리는 조직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 변화는 보호무역의 강화로만 해석하기 어렵다. 규제의 목적은 국경을 닫는 데 있지 않다. 규칙을 통과하는 교역만 허용하겠다는 신호에 가깝다. 문제는 그 규칙이 점점 기술적이고 복합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대응할 수 없고, 대응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밀려난다.

원산지와 추적이 무역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가격 경쟁력의 의미도 달라진다. 싼 제품이 아니라 규범을 충족한 제품이 선택된다. 소비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기업의 가격표 뒤에는 규범 준수 비용이 포함된다. 통상은 더 이상 외부 변수로 처리할 수 없는 경영 요소다.

보이지 않는 관세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눈에 띄는 관세 인상보다 더 조용하지만, 더 깊게 산업 구조를 바꾸고 있다. 원산지는 문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로 이동했고, 신뢰는 기술과 시스템으로 증명해야 한다. 공급망은 이제 단순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