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상 리포트⑥] 소비지 인접 생산, ‘노 리그렛’ 전략이 표준이 되다

효율의 시대가 끝나고 회복탄력성이 기준이 되다 짧은 공급망과 복수 거점, 비용보다 중단을 피하는 선택 기업 이사회가 다시 계산하는 제조의 위치

2025-12-21     박채빈 기자
통상·산업 대전환- 리쇼어링, 디커플링, 제로클릭 시대의 생존 공식.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사진=McKinsey & Company 영상갈무리,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채빈기자]글로벌 기업의 제조 전략이 다시 쓰이고 있다. 핵심은 단순하다. 가장 싸게 만드는 방식에서, 멈추지 않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강조한 ‘노 리그렛(no-regret) 전략’은 이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규범과 통상 리스크가 상시화된 환경에서, 후회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선택은 소비자 기반 가까이에 생산을 두는 것이다.

과거의 글로벌 제조는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임금이 낮고 규제가 느슨한 지역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집중시키고, 물류로 이를 연결하는 방식이 표준이었다. 이 구조는 가격 경쟁력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취약성을 키웠다. 팬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은 이 취약성이 얼마나 큰 비용으로 돌아오는지를 보여줬다.

현재의 통상 환경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비용이 아니다. 중단이다. 관세 인상보다 무서운 것은 통관 지연이고, 규제 해석 변경이다. 어느 날 갑자기 특정 부품이 규제 대상이 되거나, 원산지 기준이 바뀌어 출하가 멈출 수 있다. 이때 생산비가 조금 낮았다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때문에 기업 이사회가 다시 묻는 질문은 바뀌었다. 얼마나 싸게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언제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가다. 소비지 인접 생산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답이다. 주요 시장 가까이에 제조 거점을 두면 관세와 통관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규범 변화에 대한 대응 속도도 빨라진다.

이 전략은 완전한 리쇼어링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공정을 본국으로 되돌리는 방식은 비용과 인력 측면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대신 핵심 공정과 최종 조립, 규제 민감 공정을 시장 인근에 배치하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공정은 다른 지역에 분산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제조는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여러 장소의 조합이 된다.

복수 거점 전략은 효율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희생은 계산 가능한 비용이다. 반면 공급 중단과 시장 접근 차단은 계산이 불가능하다. 기업은 점점 후자를 더 큰 리스크로 본다. 비용을 줄이는 전략은 실패해도 손실을 예측할 수 있지만, 중단은 사업 전체를 흔든다.

이 변화는 제조 현장에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기업 조직의 구조도 함께 바뀐다. 생산과 물류, 통상과 규제 대응이 하나의 의사결정 체계로 묶인다. 공급망 전략은 더 이상 운영 부서의 문제가 아니다. 경영 전략의 핵심으로 올라온다. 이사회 차원에서 생산 위치와 통상 리스크를 함께 논의하는 이유다.

한국 기업의 경우 이 선택은 더욱 까다롭다. 중국은 여전히 중요한 생산 거점이지만, 동시에 규제 리스크의 중심이다. 미국과 유럽은 시장이자 규범의 출발점이다. 이 세 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구조에서 단일 생산 전략은 위험을 키운다. 결국 북미와 유럽, 아시아를 잇는 다중 허브 구조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와 배터리, 반도체 산업은 이미 이런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다. 완성차 공장과 배터리 공장이 주요 시장 인근으로 이동하고, 반도체는 설계와 제조, 패키징을 지역별로 나누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이는 비용 문제가 아니라 접근권의 문제다.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소비지 인접 생산은 브랜드 전략과도 연결된다. 로컬 생산과 로컬 고용은 단순한 공급망 선택을 넘어 신뢰와 안정의 신호로 작동한다. 규범을 충족하고 책임을 지는 기업이라는 메시지는 가격 경쟁력을 보완하는 요소가 된다. 생산의 위치는 점점 브랜드의 일부가 된다.

이 전략의 한계도 분명하다. 생산비 상승과 운영 복잡성 증가는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공정을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규범과 통상 리스크에 가장 민감한 지점을 선별해 이동시키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노 리그렛 전략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선택과 분리의 문제다.

효율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효율의 기준이 달라졌다. 가장 빠르고 싼 구조가 아니라,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구조가 선택된다. 소비지 인접 생산은 이 변화의 결과이자 출발점이다. 제조의 위치는 더 이상 지도상의 문제가 아니다. 전략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