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시계와 권력, 사치의 언어는 어떻게 붕괴되는가
뇌물의 상징으로 축적된 고가 시계, 변화한 권력 구조 앞에서 흔들리는 의미
[KtN 임우경기자]시계는 오랫동안 권력의 물건이었다. 시간을 보여주는 도구라기보다 지위를 암시하는 장치였고, 기술보다 가격이 먼저 읽혔다. 정치권과 재계, 관료 조직을 거치며 고가 시계는 설명이 필요 없는 신호로 기능했다. 작고, 고가이며, 즉각적으로 가치가 인식되는 특성은 시계를 권력의 그늘에서 가장 효율적인 매개체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고급 시계는 사치품을 넘어 뇌물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를 함께 떠안게 됐다.
이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이 투명해질수록, 감시와 기록이 강화될수록 과거의 상징은 더 또렷하게 문제화된다. 권력이 무너질 때 권력을 상징하던 물건도 함께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 고가 시계 산업이 마주한 불편함은 기술이나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의 문제다.
바쉐론 콘스탄틴 오버시즈 하이 주얼리 35mm는 이 맥락을 응축한 사례다. 기술적 완성도와 공정 수준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격 또한 시장 논리 안에서는 설명 가능하다. CHF 264,000이라는 숫자는 하이 주얼리 공정과 보석 물량을 고려하면 무리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화려함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 시계는 다시 권력의 언어로 읽히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불편함이 발생한다.
이 선택은 개별 브랜드의 취향 문제가 아니다. 산업 구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리치몬트 그룹의 최근 실적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2025 회계연도 기준 리치몬트 전체 매출은 약 214억 유로로 전년 대비 증가했지만, 성장을 견인한 축은 시계가 아니라 주얼리였다.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을 중심으로 한 주얼리 부문은 153억 유로 매출과 30%를 넘는 마진을 유지했다. 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 포함된 스페셜리스트 워치메이커 부문은 아시아 시장에서 큰 폭의 감소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시계 브랜드들이 고가·주얼리 영역으로 이동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미학적 진화라기보다 생존 전략에 가깝다. 바쉐론 콘스탄틴 역시 2023년 매출 10억 스위스프랑을 넘긴 이후 초고가 하이 주얼리 시계를 통해 브랜드 프리미엄을 유지하려 한다. 오버시즈 하이 주얼리는 이 전략의 결과물이다.
문제는 전략의 타당성이 아니라 전략이 만들어내는 인식이다. 아시아 시장 약세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초고가 하이 주얼리 시계는 대량 판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실질적인 매출 기여는 제한적이며, 투자와 보관 중심의 수요가 주를 이룬다. 이 흐름은 시계를 다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소유하는 물건으로 되돌린다. 과거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던 시계의 기억이 이 지점에서 재호출된다.
권력의 구조는 이미 달라졌다. 정치 권력은 감시와 기록 앞에서 취약해졌고, 자본 권력 역시 투명성과 책임을 요구받는다. 손목 위의 물건 하나로 지위를 암시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럼에도 고급 시계 산업이 여전히 가격과 희소성에 의존할 경우, 시계는 시대와 충돌한다.
오버시즈 하이 주얼리는 이 충돌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포츠 워치라는 이름 아래 장식을 극대화한 선택은 기술적 역량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계를 다시 보여주기 위한 오브제로 만든다. 의도와 무관하게 과시의 언어가 먼저 읽힌다. 고가 시계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위험은 완성도의 부족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의 어긋남이다.
오늘의 소비자는 과거와 다르다. 고급 소비는 점점 더 설명을 요구받고, 맥락 없는 사치는 빠르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권력의 언어로 사용되던 물건은 이제 스스로를 해명해야 한다. 기술과 역사, 사용의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고가는 곧바로 과시로 해석된다. 과시는 다시 권력의 냄새를 불러온다.
시계 산업이 직면한 과제는 분명하다. 더 많은 보석이나 더 높은 가격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 속에서 시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리하는 일이다. 권력의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급 시계는 권력의 추락과 함께 의미를 잃는다. 반대로 권력과 거리를 두고 시간과 기술, 사용의 경험을 중심에 놓는 시계는 다른 경로를 찾을 수 있다.
오버시즈 하이 주얼리는 잘 만들어진 시계다. 동시에 이 시계는 고급 시계 산업이 어디에서 멈춰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화려함과 가격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남은 것은 사치가 어떤 언어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시계는 다시 권력의 물건으로 남을 수도 있고, 권력 이후의 사치로 재정의될 수도 있다. 방향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