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산업 진단④] 정산은 왜 늘 깜깜한가

‘영업비밀’이라는 이름의 정보 비대칭

2025-12-23     박준식 기자
‘가짜 할인’ 구조가 무너뜨린 제작 생태계.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영화 산업에서 정산은 단순한 회계 절차가 아니다. 정산은 영화의 가치가 최종적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며, 제작과 투자의 성과가 숫자로 확정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산업의 정산 구조는 오랫동안 불투명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영화인연대가 문제 삼은 ‘깜깜이 정산’은 일부 관행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굳어진 정보 비대칭의 결과다.

현재 제작사와 배급사가 제공받는 정산 자료는 제한적이다. 총 매출액과 정산 금액이 핵심 항목으로 전달되지만, 그 숫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세부 내역은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 티켓이 어떤 가격에 판매됐는지, 할인 적용 비율은 얼마였는지, 벌크 계약 물량이 전체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확인하기 어렵다. 결과만 전달되고, 과정은 가려진다.

이 불투명성의 가장 강력한 방패는 ‘영업비밀’이라는 명분이다. 상영관과 이동통신사는 계약 조건과 정산 구조를 외부에 공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상영관과 통신사의 상품이 아니라, 제작사와 배급사가 창작과 투자로 만들어낸 콘텐츠다. 콘텐츠의 소유자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조건에서 거래됐는지 알 수 없는 구조는 정상적인 시장 관계라 보기 어렵다.

정산 데이터의 비공개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제작사와 배급사는 자신의 영화가 흥행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관객 수는 일정 수준을 기록했는데 수익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그 원인이 작품의 문제인지, 유통 구조의 문제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이는 향후 기획과 투자 판단을 왜곡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정보 비대칭은 협상력의 비대칭으로 이어진다. 극장과 통신사는 판매 구조와 데이터를 독점한 채 협상 테이블에 앉고, 제작사와 배급사는 제한된 정보에 의존해 결과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정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기준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이 구조에서는 공정한 협상이 성립되기 어렵다.

‘가짜 할인’ 구조가 무너뜨린 제작 생태계.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소비자 역시 이 불투명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부 이동통신사는 고객이 결제한 금액에서 티켓 판매 대행 수수료를 공제하면서도, 이에 대한 명확한 고지를 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할인된 가격만 인식할 뿐, 실제로 어떤 비용이 어떤 명목으로 차감됐는지 알기 어렵다. 가격 구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산 투명성은 산업 선진화의 기본 조건이다.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는 판매 단가, 할인율, 플랫폼 수수료가 비교적 명확하게 공개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규제 강화가 아니라, 시장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반면 한국 영화산업은 여전히 ‘알 필요 없는 영역’이 과도하게 넓다. 그 틈에서 손실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정산 구조가 투명해질수록 책임의 주체도 분명해진다. 누가 할인을 결정했고, 누가 비용을 부담했는지,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가 드러난다. 이는 특정 주체를 공격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시장의 작동 원리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생과 협력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영화인연대의 요구는 새로운 특혜를 달라는 주장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어떤 가격에, 어떤 조건으로 팔렸는지 알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창작자의 권리이자, 시장 참여자로서의 기본적인 권한이다. 정산이 계속해서 깜깜한 상태로 남아 있는 한, 영화산업의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가격이 왜곡되고, 기준이 숨겨지고, 책임이 흐려지는 구조는 결국 산업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정산 투명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이 다시 서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최소한의 기준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