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산업 진단⑦] 2026년, 계약 하나가 산업을 가른다
벌크 할인 구조를 유지할 것인가, 공정 정산으로 돌아설 것인가
[KtN 박준식기자]한국 영화산업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작비 상승과 관객 감소라는 외형적 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수익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있다. 지난 몇 년간 고착된 티켓 벌크 계약과 불투명한 정산 구조는 산업의 체력을 잠식해 왔다. 2026년을 앞두고 예정된 이동통신사와 멀티플렉스 간 재계약은 단순한 계약 갱신이 아니다. 산업 구조를 유지할지, 수정할지 결정하는 분기점이다.
지금까지의 구조는 명확했다. 통신사는 저가로 티켓을 확보해 멤버십 혜택을 강화했고, 극장은 좌석 점유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비용은 콘텐츠 권리자에게 전가됐다. 영화는 정상 발권가가 아닌 벌크 단가를 기준으로 정산됐고, 객단가는 하락했다. 이 구조는 단기 효율을 제공했지만, 장기적인 재투자 기반을 약화시켰다. 산업의 중심이 유통 편의로 이동하면서, 창작과 제작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영화인연대가 제시한 요구는 이 구조를 되돌리자는 주장이다. 벌크 계약을 전면 배제하라는 요구는 할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 가격을 교란하는 초저가 계약을 기준으로 삼지 말자는 것이다. 정상 발권가를 정산 기준으로 삼고, 할인 비용은 할인 혜택을 제공한 주체가 부담하라는 원칙은 시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다. 이 원칙이 무너진 상태가 지금의 영화 유통 구조다.
정상 발권가 기준 정산은 단순한 숫자 조정이 아니다. 객단가 회복은 제작비 구조와 직접 연결된다. 회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제작사는 다양한 기획을 시도할 여력이 생긴다. 중·저예산 영화와 신인 중심 프로젝트가 다시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 이는 산업 다양성 회복의 출발점이다.
3자 협의체 구성 요구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티켓 가격 정책은 극장과 통신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콘텐츠의 가치와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제작사와 배급사는 계약 과정에서 배제돼 왔다. 동의권 보장이나 실질적 협의 구조가 마련되지 않는 한, 같은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협의체는 갈등 조정 기구이기 이전에 책임을 분산시키는 장치다.
정산 데이터 공개 요구는 산업 신뢰 회복의 핵심이다. 할인 전 금액, 실제 판매 금액, 할인 보전 내역이 구분된 정산 자료는 공정 거래의 최소 조건이다. 이 정보가 공개될 때 비로소 누가 비용을 부담했고,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가 분명해진다. 투명성은 규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시장을 작동시키는 기본 인프라다.
이 선택을 미룰 경우의 결과는 분명하다. 할인 경쟁은 계속되고, 객단가는 더 낮아질 것이다. 제작 환경은 더욱 보수화되고, 투자 위축은 가속된다. 관객은 가격 구조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극장은 상영할 콘텐츠의 폭이 줄어든다. 유통과 마케팅은 살아남을 수 있지만, 영화산업이라는 생태계는 점점 비어 간다.
반대로 구조를 전환할 경우 단기적인 조정 비용은 불가피하다. 일부 관객 혜택은 축소될 수 있고, 마케팅 전략은 수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비용은 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투자에 가깝다. 공정한 기준 위에서 다시 설계된 할인과 제휴는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인 관객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신뢰를 회복한 가격 구조는 다시 선택받을 수 있다.
2026년 계약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산업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영화가 여전히 창작 노동의 결과물로 존중받을 것인지, 아니면 유통 효율을 위한 소모품으로 남을 것인지의 갈림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할인이나 더 큰 마케팅이 아니다. 기준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 기준이 세워질 때, 한국 영화산업은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