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vs 산업④] 중간이 사라진 산업은 유지되지 않는다

한국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영역

2025-12-23     박준식 기자
박찬욱 '어쩔수가없다'·'케데헌', 美골든글로브 각 3개 주요 부문 진출  ‘어쩔수가 없다’ 이병헌,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작품상·외국어영화상도 진출   사진=2025 12.09   CBS New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구도는 대형 영화와 독립·예술영화의 대비다. 대형 프로젝트는 위험을 감당할 수 있고, 독립영화는 규모가 작아 생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가 보여주는 실제 변화는 다른 지점에서 시작됐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대형도, 독립도 아닌 중간 규모 영화였다.

영화진흥위원회 결산 자료에서 확인되는 개봉 편수 감소는 특정 장르나 규모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작 현장을 들여다보면 공백이 집중된 지점은 분명하다. 제작비 수십억 원대의 중간 규모 영화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영역은 한국 영화산업의 허리를 형성해 왔다. 신인 감독과 중견 감독이 성장하고, 배우와 스태프가 순환하며, 장르 실험이 가능했던 구간이다. 이 구간이 무너지면서 산업 전체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중간 규모 영화는 산업에서 완충 장치 역할을 한다. 대형 영화는 성공하면 산업을 끌어올리지만, 실패하면 손실이 크다. 독립·예술영화는 실패의 규모가 제한적이지만 산업 전체를 떠받치기에는 체급이 작다. 중간 규모 영화는 성공과 실패의 폭이 비교적 완만하다. 일정 수준의 흥행만으로도 회수가 가능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음 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 완충 영역이 사라지는 순간, 산업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문체부 업무보고와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 모두 중간 규모 영화에 대해 별도의 분석을 제시하지 않는다. 정책 문서에서는 영화산업이 하나의 덩어리로 다뤄지고, 결산 보고서에서는 전체 수치만 기록된다. 그러나 산업은 덩어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규모에 따라 작동 방식이 다르고, 위험을 감당하는 방식도 다르다. 중간 규모 영화가 빠지는 순간, 제작과 인력의 순환 구조는 급격히 약해진다.

이혜영 “늙은 여자 아닌 한 인간”…파과, 존재로 말하다  사진=2025 04.24 24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파과의 언론배급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중간 규모 영화의 붕괴는 회수 구조 악화와 직결된다. 관객 감소가 이어지면서 손익분기점은 높아졌다. 제작비 수십억 원대 영화는 일정 수준의 관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회수가 어렵다. 대형 영화는 마케팅과 상영 점유를 통해 이를 버텨낼 수 있지만, 중간 규모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이 영역이 가장 먼저 기획 단계에서 배제되는 이유다.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나타난 제작 편수 감소는 이 판단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음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장르 다양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간 규모 영화가 사라지면 장르는 빠르게 단순해진다. 흥행 가능성이 검증된 장르만 반복 생산되고, 새로운 시도는 독립영화 영역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독립영화는 상영 기회와 관객 접근성에서 제약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관객의 선택지는 줄어들고, 관객 감소는 다시 가속된다. 중간 규모 영화 붕괴는 관객 감소와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제작 인력의 이동 역시 같은 흐름을 따른다. 중간 규모 영화는 감독과 배우, 스태프에게 현실적인 일터였다. 대형 영화로 가기 전 단계이자, 독립영화 이후를 잇는 연결 고리였다. 이 영역이 사라지면서 인력은 대형 프로젝트로 쏠리거나, 산업 밖으로 밀려난다. 인력의 축적이 끊기면 산업은 단기 흥행에 의존하게 된다. 장기적인 경쟁력은 약해진다.

정책 논의에서 중간 규모 영화가 사라지는 문제는 자주 ‘시장 선택’으로 설명된다. 관객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가 보여주는 수치는 선택 이전의 조건이 이미 무너졌음을 시사한다. 상영 기회가 줄고, 마케팅 여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관객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중간 규모 영화는 선택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테이블에서 먼저 내려갔다.

박홍준 감독과 배우들, 관객과 함께하는 대화를 통해 독립영화의 현실과 가치 재조명/사진=myungfilmslab Instargram, K trendy NEWS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체부 업무보고가 제시하는 산업 정책은 대체로 양극을 기준으로 설계된다.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대형 콘텐츠와 창작 지원 대상으로서의 소규모 콘텐츠가 중심이다. 이 사이를 잇는 중간 영역은 정책 언어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산업은 이 중간 영역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중간 규모 영화는 산업의 체력이며, 완충 장치이며, 실험 공간이다.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기록된 감소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중간 규모 영화의 붕괴는 산업이 스스로 위험을 흡수하지 못하는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위험을 흡수하지 못하는 산업은 작은 충격에도 흔들린다. 관객 감소, 투자 위축, 제작 축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다.

한국 영화산업의 문제는 대형 영화가 부족해서도, 독립영화가 약해서도 아니다. 중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성장과 투자만을 말하는 정책은 산업의 실제 작동 방식과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다. 중간을 복원하지 않는 한, 영화산업은 다시 균형을 찾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