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국 영화산업은 왜 정책의 언어를 소화하지 못하는가

성장 담론과 산업 작동 원리의 불일치

2025-12-25     박준식 기자
정부업무보고(문화체육관광부, 권익위원회).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한국 영화산업을 둘러싼 논의에는 언제나 정책의 언어가 앞선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업무보고에서 영화는 문화산업의 핵심 축으로 호명된다. 성장, 투자, 확장,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문화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산업이며, 영화는 그 산업을 대표하는 콘텐츠라는 인식이 정책 문서 전반을 관통한다. 이 언어만 놓고 보면 한국 영화산업은 이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준비가 된 산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가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관객은 줄었고, 매출은 축소됐으며, 제작 편수는 감소했다. 수치는 단정적이다. 영화산업은 성장 국면이 아니라 위축 국면에 놓여 있다. 문제는 정책이 틀렸느냐, 통계가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정책이 전제하는 산업의 모습과 실제 산업이 작동하는 방식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정책의 언어를 그대로 흡수하기 어려운 산업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영화산업은 ‘투자 산업’이기 이전에 ‘회수 불확실 산업’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한 번에 투입되고, 손실은 한 번에 발생한다. 흥행 실패는 개별 작품의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제작, 다음 투자, 다음 기획까지 동시에 위축시킨다. 이 특성은 게임이나 드라마처럼 회수가 분산되고 예측 가능한 산업과 다르다. 정책 언어가 이 차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때, 산업은 반응하지 않는다.

관객 문제는 이 불일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산업에서 관객은 결과가 아니다. 관객은 산업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관객이 줄어드는 순간 매출이 줄고, 매출 감소는 회수 가능성을 약화시키며, 회수 불확실성은 제작과 투자를 동시에 위축시킨다. 이 연결 고리는 단순하다. 그럼에도 정책 문서에서 관객은 산업 정책의 중심 변수로 다뤄지지 않는다. 관객은 문화 향유의 영역으로 분리되고, 산업은 제도와 금융의 문제로 다뤄진다. 이 분리는 영화산업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중간 규모 영화의 붕괴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한국 영화산업은 대형 영화와 독립·예술영화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제작비 수십억 원대의 중간 규모 영화는 산업의 허리였다. 인력이 순환하고, 장르가 다양해지며, 실패의 위험을 흡수하는 완충 지대였다. 이 영역이 무너지면서 산업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대형 프로젝트로 자본이 쏠리고, 나머지는 기획 단계에서 사라진다. 정책 언어가 이 중간 영역을 명확히 포착하지 못하는 순간, 산업의 체력은 빠르게 소진된다.

 

독립·예술영화가 늘 고립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독립·예술영화는 오랫동안 보호의 대상이었다. 지원은 있었지만, 산업 안으로 편입된 적은 거의 없다. 제작 이후의 상영, 회수, 재투자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보호와 편입을 구분하지 못한 정책은 독립·예술영화를 늘 예외로 남겨두었다. 예외는 지속 가능한 산업의 일부가 될 수 없다.

플랫폼 환경 역시 영화산업의 취약함을 드러냈다. OTT는 영화산업을 무너뜨린 원인이 아니다. 극장 중심 단일 유통 구조의 한계를 드러낸 계기다. 드라마와 게임은 플랫폼에 맞춰 제작 방식과 회수 구조를 조정했다.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영화는 콘텐츠 산업으로 불리지만, 콘텐츠 산업이 요구하는 유통 유연성과 회수 다변화를 확보하지 못했다. 극장에서도, 플랫폼에서도 중심이 되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왜 정책의 언어를 소화하지 못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정책의 언어는 성장과 확장을 전제로 하지만, 영화산업은 현재 버티기와 회복을 요구받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작동 원리가 바뀌었는데, 정책의 문법은 여전히 과거의 성공 경험에 머물러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 확대나 투자 구호가 아니다. 영화산업을 어떤 산업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재정의다. 회수 구조, 관객 조건, 중간 규모 유지, 유통 다변화가 함께 작동하지 않는 한 어떤 성장 담론도 현실이 되기 어렵다. 영화산업은 더 키우기 전에 먼저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은 종종 산업을 앞서간다. 그러나 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언어는 결국 공중에서 맴돈다. 한국 영화산업이 정책의 언어를 소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산업의 몸과 정책의 말이 서로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리듬을 다시 맞추지 않는 한, 성장이라는 단어는 계속해서 산업 바깥에서 울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