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기획⑦] 한국 기업, 참가자를 넘어 기준이 되다

CES 2026이 보여준 산업 질서 변화의 중심

2025-12-28     박준식 기자
[CES 2026 리포트] 하이프의 종말, 작동하는 기술의 시대.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CES 2026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국 기업의 위치다. 과거 CES에서 한국 기업은 빠르게 추격하는 제조 강국의 이미지가 강했다. 대규모 부스와 완성도 높은 제품으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전시회의 흐름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지는 못했다. CES 2026은 이 구도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은 더 이상 전시에 참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산업 전환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Deloitte가 정리한 「CES 2026 Preview」 보고서는 이 변화를 수치로도 확인한다. CES 2026 혁신상 수상 기업 가운데 한국 기업의 비중은 압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히 참가 기업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다. AI 인프라, 운영체제, SDV, 로보틱스, 전력과 에너지 등 CES의 핵심 의제를 구성하는 영역에서 한국 기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술의 중심축이 이동한 영역에서 한국 기업의 존재감이 강화되고 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산업 구조의 특성이 있다. 한국은 가전, 자동차, 반도체, 에너지, 통신, 인프라를 동시에 보유한 드문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개별 기술의 완성도보다, 기술을 어떻게 연결하고 운영하는지가 중요한 시점에서 이러한 구조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CES 2026이 보여주는 산업 경쟁은 단일 기술의 우열을 가리는 무대가 아니다. 복합 산업 역량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AI 인프라 경쟁에서 한국 기업의 강점은 분명하다. 반도체와 메모리, 서버용 부품, 에지 디바이스까지 이어지는 하드웨어 기반은 Operative AI 시대에 필수 조건이다. 여기에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통합 역량이 더해지면서 산업 현장에서 바로 적용 가능한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CES 2026에서 한국 기업의 전시는 화려한 데모보다, 실제 운영 구조를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운영체제 경쟁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가전, 자동차, 산업 장비를 모두 보유한 산업 구조는 Home OS, Car OS, Industrial OS를 동시에 설계하고 실험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이는 단일 플랫폼 기업이 따라오기 어려운 영역이다. CES 2026에서 한국 기업이 OS 통합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다. 운영체제는 더 이상 소프트웨어 문제가 아니다. 산업 전체를 설계하는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SDV와 모빌리티 영역에서도 한국 기업의 위치는 달라졌다. 완성차 제조와 부품 공급, ICT 역량이 결합된 구조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으로의 전환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CES 2026에서 한국 기업이 제시한 SDV 전략은 기술 시연이 아니라, 실제 적용 가능한 아키텍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동차를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복합 역량이 전시에 그대로 드러난다.

로보틱스와 Physical AI 영역에서도 한국 기업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산업용 로봇과 서비스 로봇, 물류 자동화 분야에서 축적된 경험은 Physical AI 시대의 중요한 자산이다. CES 2026에서 한국 기업이 보여준 로봇 기술은 미래상을 그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미 현장에서 작동 중인 구조를 전제로 한다. 이는 기술 신뢰도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전력과 에너지, 인프라 영역은 한국 기업의 위상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다. 발전, 송배전, 원전, 수자원 관리까지 이어지는 인프라 경험은 AI 시대에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 CES 2026에서 한국 기업이 전력 관리와 에너지 솔루션을 전면에 내세운 배경이다. 기술 전시회에서 국가 인프라 기업이 주목받는 장면은 산업 질서 변화의 상징으로 읽힌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분업 구조의 재편과도 연결된다. 과거 글로벌 기술 산업은 설계와 플랫폼은 미국, 제조는 아시아라는 구도가 뚜렷했다. CES 2026은 이 구도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 운영 기술이 중요해지면서, 제조와 운영 경험을 동시에 가진 국가와 기업이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부상은 이러한 구조 변화의 결과다.

물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중국 기업은 가격 경쟁력을 넘어 기술 완성도를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미국 기업은 플랫폼과 표준을 앞세워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다. 일본 기업은 정밀 기술과 부품 경쟁력을 재정비하고 있다. CES 2026은 기술 패권 경쟁이 본격적인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에게도 안주할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CES 2026이 확인한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 기업은 더 이상 전시회의 참가자에 머물지 않는다. 산업 전환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으로 이동하고 있다. 기술을 잘 만드는 기업에서, 산업을 운영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기업으로의 이동이다. CES 2026은 이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무대다.

산업의 중심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기술의 우열보다 운영 능력이 중요해지는 시대다. CES 2026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한 위치는 일시적인 성과가 아니다. 산업 질서가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난 구조적 결과다. 한국 기업은 이제 참가자가 아니라, 기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