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미술④] 비명과 피난처
유리스탄벡 쉬가예프가 재난을 그리는 방식
[KtN 박준식기자]재난은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재난은 구조로 남는다. 유리스탄벡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지진과 붕괴, 피난의 장면은 특정 시점을 기록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화면에 등장하는 재난은 뉴스의 장면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상태다. Yuristanbek Shygaev의 연작에서 비명은 소리로 표현되지 않고, 피난처는 안전한 장소로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세계 속에서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구조로 작동한다.
쉬가예프가 재난을 다루는 방식은 즉각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공포를 극대화하지도, 비극을 연출하지도 않는다. 화면은 차분하고, 인물의 표정은 절제돼 있다. 그러나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제거된 자리에서 불안이 더 오래 남는다. 재난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는 장면을 소비하지 못한다. 대신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지진을 다룬 연작에서 건물은 무너진 순간이 아니라 무너진 이후의 상태로 등장한다. 파괴의 장면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균열, 기울어진 구조, 어긋난 선이 화면을 지배한다. 인물은 달아나지 않고, 영웅적으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화면 속 인물은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다. 움직임이 없는 이 정지는 재난 이후의 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상태, 그 상태가 화면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쉬가예프 작업 전반에 흐르는 세계관과 연결된다. 인간은 자연을 통제하지 못한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주체다. 재난은 외부에서 침입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로 제시된다. 이 인식은 유목 문화가 지닌 자연관과 맞닿아 있다. 자연은 위협이자 삶의 조건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쉬가예프는 이 관계를 도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비난도 없고, 미화도 없다. 화면에는 관계만 남는다.
비명 연작에서도 동일한 태도가 유지된다. 비명은 입을 벌린 인물로 표현되지 않는다. 소리는 시각화되지 않는다. 대신 화면의 구조가 비명을 대신한다. 왜곡된 공간, 불균형한 구도, 긴장된 선의 배열이 비명의 역할을 수행한다. 관람자는 소리를 듣지 않지만, 비명을 인식한다. 이는 감각의 과잉을 피하면서도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피난처를 다룬 작업에서도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피난처는 보호의 공간이 아니라 임시적 상태로 등장한다. 천막, 벽, 간이 구조물은 완결된 공간이 아니다. 언제든 붕괴될 수 있는 구조다. 화면 속 인물은 안도하지 않는다. 피난은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설정은 재난을 일시적 사건으로 소비하는 시선과 거리를 둔다.
쉬가예프의 재난 연작은 특정 국가나 사건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명도, 연도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지시성은 작업을 추상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다. 특정 사건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화면은 다양한 경험과 연결된다. 재난은 언제든,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상태로 인식된다.
형식적으로도 이러한 태도는 분명하다. 색채는 절제돼 있고, 화면은 과장되지 않는다. 어둡지만 선정적이지 않고, 차분하지만 무겁다. 선은 흔들리지 않고, 구조는 유지된다. 이러한 안정성은 재난의 혼란을 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세계는 흔들리지만, 화면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 대비는 작가가 재난을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동시대 미술에서 재난을 다루는 방식과도 차이를 만든다. 많은 작업이 재난을 이미지의 강도로 제시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로 환원한다. 쉬가예프는 그 경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재난은 주장으로 전환되지 않고, 도식화되지 않는다. 대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다시 배치된다. 화면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구조를 제시한다.
쉬가예프의 재난 연작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인간의 위치다. 인간은 작고, 중심에 서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화면에서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무력하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비극을 소비하지 않는 방식이며, 동시에 인간을 존엄하게 다루는 방식이다. 연민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존엄이 유지된다.
이러한 작업은 환경 위기와 재난이 일상이 된 오늘의 조건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그러나 쉬가예프의 화면은 시의성을 앞세우지 않는다. 특정 담론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현재와 깊게 연결된다. 재난을 사건이 아니라 구조로 인식하는 태도는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
쉬가예프의 재난 연작은 중앙아시아 미술이 감정적 서사나 민속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구조적 사고, 절제된 형식, 장기적인 시선을 통해 재난을 다룬다. 이 방식은 지역 미술의 범주를 넘어 동시대 회화가 재난을 다루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비명은 들리지 않지만 남아 있고, 피난처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존재한다. 쉬가예프의 화면은 그 사이의 상태를 붙잡는다. 사건 이후의 시간, 붕괴 이후의 삶, 불안 속에서도 유지되는 관계의 구조. 재난은 끝나지 않았고, 삶도 끝나지 않았다. 쉬가예프의 회화는 그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