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미술⑤] 종이는 캔버스가 아니다

유리스탄벡 쉬가예프가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

2025-12-31     박준식 기자
쉬가예프의 예술은 단순히 미적 아름다움을 넘어, 키르기스스탄 고유의 문화와 가치를 현대적 언어로 재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종이는 회화의 하위 매체로 취급돼 왔다. 스케치의 표면, 준비 단계의 흔적, 완성 이전의 과정물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유리스탄벡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종이는 그런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종이는 회화를 대신하는 표면이 아니라, 기억을 저장하는 장치다. 종이 위에 남은 선과 흔적은 결과가 아니라 축적이다. Yuristanbek Shygaev의 종이 작업은 캔버스로 옮겨가기 위한 예비 단계가 아니라, 독립된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언어다.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종이는 가볍지 않다. 물성은 얇지만, 담고 있는 시간은 두껍다. 종이 위에는 단정한 선만 남아 있지 않다. 긁힘, 번짐, 겹침이 함께 남아 있다. 이는 기술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흔적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남겨진 시간의 층위다. 종이는 수정과 되돌림을 허용하는 표면이며, 그 허용성은 기억이 축적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사고의 이동 경로다.

쉬가예프의 종이 작업을 보면 완결된 장면이 드물다. 화면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 인물은 설명되지 않고, 공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완이라는 인상은 남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하다. 이 충분함은 종이가 감당하는 역할에서 비롯된다. 종이는 사건을 설명하지 않고, 상태를 저장한다. 완결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화면은 오래 남는다.

혼합기법으로 확장된 작업에서도 종이의 역할은 유지된다. 물감, 잉크, 콜라주가 겹쳐지지만, 종이는 지워지지 않는다. 바탕으로 밀려나지 않고, 표면으로 남는다. 이 선택은 매체의 위계를 거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캔버스가 중심이고 종이가 보조라는 전통적 구도는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표면은 동등하다. 중요한 것은 표면의 크기가 아니라, 표면이 감당하는 시간이다.

쉬가예프의 예술은 단순히 미적 아름다움을 넘어, 키르기스스탄 고유의 문화와 가치를 현대적 언어로 재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쉬가예프의 종이 작업에서 기억은 서사로 정리되지 않는다. 과거의 사건이 정돈된 이야기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파편이 남는다. 조각난 이미지, 반복되는 기호, 끊어진 선이 함께 존재한다. 이 파편성은 혼란을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기억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 가깝다. 기억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고, 겹치며, 때로는 어긋난다. 종이는 이러한 불완전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태도는 유목 문화가 지닌 기억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기록은 돌이나 문서에 고정되지 않는다. 기억은 사람을 통해 이동하고, 반복을 통해 유지된다. 쉬가예프의 종이 작업은 이러한 이동성과 반복성을 시각화한다. 동일한 기호가 여러 장의 종이에 반복 등장하고, 선의 방향은 조금씩 달라진다. 완벽한 복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유사성이 축적된다. 이 축적이 곧 기억의 형성 방식이다.

종이는 또한 속도의 문제를 드러낸다. 종이 작업은 빠르게 만들어질 수 있지만,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작은 크기는 관람자의 시선을 느리게 만든다.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오래 바라봐야 한다. 대형 회화가 한눈에 전달하는 인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시선을 붙잡아 두는 시간을 만든다. 쉬가예프는 이 시간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이미지의 즉각성이 아니라, 체류 시간을 중시한다.

이러한 선택은 동시대 미술 환경의 변화와도 연결된다. 대형 캔버스와 극적인 서사가 주목받던 시기를 지나, 종이와 소형 작업이 다시 읽히고 있다. 그러나 쉬가예프의 종이 작업은 이러한 흐름에 반응한 결과물이 아니다. 오랜 시간 지속돼 온 태도의 연장선에 가깝다. 유행이 변했기 때문에 선택된 매체가 아니라, 세계관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는 표면이었기 때문에 유지됐다.

Симфония красок. 2006. Холст, масло. 60х50. Собственность автора Symphony of colors. 2006. Oil on canvas. 60x50. The Property of the artist [갤러리 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혼합기법 작업에서도 종이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재료가 늘어나도 화면은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절제된다. 종이는 과잉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물감의 밀도, 잉크의 번짐, 콜라주의 겹침은 종이의 질감 위에서 정리된다. 이 정리는 통제가 아니라 균형이다. 화면은 무너지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작가가 아카데미에서 체득한 구조 감각과도 연결된다.

쉬가예프의 종이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소장과 전시의 방식이다. 종이는 이동이 쉽고, 공간에 유연하게 반응한다. 한 장으로도 읽히고, 여러 장이 모여 하나의 군집을 이룰 수도 있다. 이러한 유연성은 작업을 단일 오브제로 고정하지 않는다. 전시마다 다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종이는 닫힌 작품이 아니라 열린 구조로 기능한다.

이러한 개방성은 쉬가예프 작업 전반에 흐르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세계는 고정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종이는 이 재배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허용하는 표면이다. 캔버스가 완결을 요구한다면, 종이는 과정을 수용한다. 쉬가예프는 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Похищение. 1987. Холст, масло. 60х180. Из коллекции Владимира Кирюши, Кыргызстан Kidnapping. 1987. Oil on canvas. 60x180. From the collection of Wladimir Kiryusha, Kyrgyzstan [갤러리 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종이 위에 남은 흔적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람자는 서사를 읽으려 하기보다 상태를 느끼게 된다. 이 경험은 신화적 사고와도 닮아 있다. 신화는 완결된 이야기라기보다 반복되는 이미지와 관계의 집합이다. 종이 작업은 그 집합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한 장의 종이는 하나의 기억이고, 여러 장이 모이면 세계가 된다.

유리스탄벡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종이는 캔버스를 대체하지 않는다. 종이는 회화가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을 담당한다. 기억의 불완전성, 시간의 겹침, 관계의 유동성이 종이 위에 남는다. 이 표면은 작가의 세계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소다. 종이는 가볍지 않다.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종이는 가장 무거운 기억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