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2026⑥] 문화는 부속이 아니다
K-컬처를 ‘성장 전략’으로 격상한 선택의 함의
[KtN 박준식기자]대통령의 2026년 신년사에서 문화는 장식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문단의 위치부터 다르다. 경제와 산업, 안전과 국토 전환을 거친 뒤 문화가 놓인다. 이는 문화가 성과를 포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성장 구조의 한 축이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음을 보여준다. 신년사는 문화를 여가나 이미지 관리의 영역에서 끌어내 산업과 국가 경쟁력의 영역으로 올려놓는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 정책은 오랫동안 두 갈래로 나뉘어 왔다. 한쪽에서는 시장성을 앞세운 콘텐츠 산업이, 다른 한쪽에서는 공공성에 기대는 예술 지원이 분리돼 움직였다. 이 분리는 효율을 높이는 대신 지속성을 약화시켰다. 흥행은 반복되기 어려웠고, 기초는 취약해졌다. 신년사는 이 분리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K-콘텐츠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성과가 유지되기 위한 기반을 함께 언급한다.
K-콘텐츠 수출이 이차전지와 전기차를 넘어섰다는 언급은 상징적이다. 문화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없으면 경쟁력이 흔들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시에 이 성과가 자연 발생적 유행이 아니라는 점도 암시한다. 산업적 성취는 구조 위에서만 유지된다. 신년사가 예산을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조 6천억 원이라는 문화 예산 증액은 선언을 넘어 정책의 방향을 명확히 한다.
주목할 점은 예산의 성격이다. 신년사는 콘텐츠 수출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중문화의 뿌리로서 기초예술을 함께 언급한다. 이는 단기 성과 중심의 정책이 낳은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신호다. 히트작이 쌓일수록 기반이 약해지면 산업은 소모된다. 문화 생태계 전체를 다루지 않으면, 성장 전략으로서의 문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문화가 산업과 만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K-팝 팬덤이 K-뷰티 소비로 이어지고, 드라마 시청이 식품과 관광 수요를 끌어올리는 흐름은 이미 관찰 가능한 현상이다. 신년사는 이 연결을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문화를 매개로 산업이 움직이는 구조를 정책적으로 다루겠다는 태도다. 이는 문화 정책이 단일 부처의 영역을 넘어, 산업·관광·외교와 연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접근에는 분명한 계산이 있다. 제조업 중심의 성장 모델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문화는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고 확장성이 크다. 동시에 고용 효과와 지역 파급력도 높다. 공연, 전시, 촬영, 제작은 특정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국토 전환과 맞물릴 경우, 문화는 지역 정착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신년사가 문화와 지역을 따로 떼어 말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문화의 성장 전략화에는 위험도 따른다. 과도한 산업화는 창작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다. 지원이 성과 지표로만 환원될 경우, 표현의 다양성은 줄어든다. 신년사가 기초예술을 함께 언급한 대목은 이 위험을 의식한 결과로 읽힌다. 문화의 경쟁력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이 다양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산업적 성과도 지속되기 어렵다.
문화 예산 확대는 집행 방식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대형 프로젝트 중심의 투자는 단기 성과를 만들 수 있지만, 생태계를 키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창작자 개인과 소규모 단체, 지역 기반 활동이 함께 숨 쉴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신년사는 세부 정책을 나열하지 않지만, ‘풍성한 문화 생태계’라는 표현을 통해 방향을 제시한다. 성과를 좇되, 토양을 잃지 않겠다는 뜻이다.
문화의 국제적 확장 역시 이전과 다른 톤으로 다뤄진다. 한류의 확산을 자랑하는 대신, 세계 속에 ‘넓고 깊게’ 스며들겠다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는 일회성 유행이 아니라, 일상 속 문화로 자리 잡겠다는 목표에 가깝다. 문화 외교가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장기 전략으로 다뤄지는 지점이다.
이번 신년사에서 문화는 경제의 보조 지표가 아니다. 성장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에 가깝다. 문화가 살아 있는 사회는 소비가 단기적이지 않고, 산업의 파급 효과도 길게 이어진다. 반대로 문화가 소모되는 사회는 성과를 반복하기 어렵다. 신년사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2026년 문화 정책의 성패는 흥행작 숫자로만 판단하기 어렵다. 창작 환경이 개선되는지, 기초예술이 지속 가능한 기반을 갖추는지, 문화 산업이 지역과 연결되는지, 해외에서의 소비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지가 함께 봐야 할 기준이다. 문화가 성장 전략으로 자리 잡는다는 말은, 그만큼 관리와 책임이 뒤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화는 부속이 아니다. 이번 신년사는 이 명제를 정책의 전면에 올려놓는다. 제조와 기술, 자본과 인프라만으로는 국가의 다음 단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문화는 속도를 내는 도구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기준이다. 2026년의 문화 정책은 그 기준이 실제 구조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단계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