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trendy NEWS 기획 | 피카소 31⑤] 얼굴을 지운 초상
1969년 〈상상의 초상화 I〉, 피카소는 왜 닮음을 끝내 거부했는가
[KtN 박준식기자] 초상화는 오랫동안 사회가 개인을 기억하고 분류하는 수단으로 기능해 왔다. 얼굴은 신분과 역할을 드러내는 표식이었고, 회화는 그 표식을 시각적으로 고정하는 장치였다. 귀족의 위엄과 권력의 정당성, 개인의 성격과 사회적 위치가 얼굴 위에 질서 있게 배열됐다. 초상화는 설명을 전제로 성립한 장르였으며, 닮음은 설명을 완성하는 핵심 조건으로 작동했다. 미술사는 이러한 관습을 축적하며 전개돼 왔다.
1969년 제작된 〈상상의 초상화 I〉은 이러한 관습에서 명확히 벗어난 작업이다. 작품에는 특정 인물이 설정되지 않는다. 이름도 없고, 신분도 없으며, 해석을 요구하는 서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얼굴의 형식만 남은 상태에서 기록의 목적은 후퇴한다. 초상화가 담당해 온 재현과 설명의 기능은 중심에서 밀려난다. 이 작품은 초상화라는 장르가 오랫동안 수행해 온 역할을 전면에서 재검토하며, 형식 자체를 다시 세운다.
‘말년’이라는 구분이 의미를 잃는 지점
1969년은 여든일곱의 나이에 이른 시기다. 관례적으로라면 말년이라는 범주에 넣기 쉬운 시점이다. 그러나 당시의 작업을 쇠퇴라는 단어로 묶기는 어렵다. 형식은 더 간결해졌고, 손의 움직임은 오히려 빨라졌다. 색은 과감해졌으며, 선은 불필요한 요소를 걷어낸다. 젊은 시절부터 반복해 온 실험과 실패, 수차례의 양식 전환이 작업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이미 자신의 위치를 증명한 이후의 상태다. 예술사적 평가를 의식할 이유도, 경쟁을 전제로 할 대상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회화 앞에서의 태도다. 그 태도는 놀라울 만큼 가볍고 자유롭다. 〈상상의 초상화 I〉에서 얼굴은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눈과 윤곽은 균형을 의도적으로 벗어나고, 시점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해부학적 정확성은 중요하지 않다. 초상은 개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회화가 감당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초상화의 기능을 내려놓는 선택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얼굴은 사회적 의미를 담는 틀이었다. 신분과 지위, 역할과 성향이 얼굴 위에 정리돼 배치됐다. 초상은 개인을 기록하는 동시에 사회 질서를 시각적으로 정돈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상상의 초상화 I〉에서는 이런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얼굴은 더 이상 사회적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무엇을 대표하거나 설명하려는 목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초상화가 오랫동안 맡아온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는 선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얼굴은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 내면을 해석하려는 장치도 전면에 놓이지 않는다. 초상은 보여주기 위한 장르에서 벗어나 형식 자체를 점검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얼굴이라는 틀이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회화는 어떤 규칙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방식이다.
초상화는 더 이상 설명의 도구가 아니다. 대상에 대한 정보 전달을 멈춘 자리에서, 회화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재료 선택이 드러내는 작업의 방향
〈상상의 초상화 I〉연작은 계획된 프로젝트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프랑스 무쟁의 작업실로 미술 용품이 배송됐고, 포장에 사용된 골판지가 남았다. 일반적으로 버려지는 재료다. 작업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골판지 위에 구아슈와 오일이 얹히고, 선과 색이 빠르게 이어진다. 형상은 사전에 정해지지 않는다. 손의 움직임이 먼저 나가고, 이미지는 뒤따른다.
재료의 격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앞선다. 손에 닿는 질감, 반복되는 움직임, 즉각적인 반응이 작업을 이끈다. 회화는 특별한 주제나 귀한 재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는 행위 자체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상상의 초상화〉 연작은 이런 태도가 축적된 결과다. 형식은 미리 정해지지 않고, 작업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린다.
마르셀 살리나스와의 협업, 판화가 선택한 방식
〈상상의 초상화 I〉은 제작 방식에서부터 일반적인 판화와 다른 길을 택한다. 원화를 기계적으로 옮기는 절차는 배제됐다. 석판화 제작에는 마르셀 살리나스가 참여했고, 작업은 복제보다 재구성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행됐다. 석판 위에 이미지를 다시 그리는 과정이 반복됐다. 붓질의 방향과 속도, 색의 번짐까지 손의 감각으로 옮기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은 판화를 단순한 복제 매체로 두지 않는다. 회화의 성격을 유지한 채 다른 형식으로 옮기는 작업에 가깝다. 제작 전 단계는 엄격하게 관리됐다. ‘Bon à tirer’ 승인 이후에만 인쇄가 허용됐고, 사용된 판은 이후 파기됐다. 무분별한 증식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피카소의 이름과 함께 살리나스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병기된 사례는 흔치 않다. 이는 이 연작이 기술적 보조를 넘어선 협업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상상의 초상화〉 시리즈는 판화를 회화의 하위 형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제작 방식 자체가 작품의 일부로 기능하며, 판화의 위상을 다시 설정한다.
총사의 형상, 권위를 다루는 방식
〈상상의 초상화 I〉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은 17세기 총사를 떠올리게 한다.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와 고전적 복식이 형태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이 형상은 위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선은 의도적으로 흔들리고, 색은 과장된다. 고전적 외형은 유지되지만, 권위를 떠받치는 장치는 해체된다.
총사라는 도상은 말년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고전 회화 전통과의 연결을 암시하는 동시에, 노년에 접어든 작가의 시선이 반영된 형상으로 읽힌다. 다만 영웅화나 자기 과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익살과 비틀림이 전면에 놓인다. 인물은 존엄한 주체라기보다 역할을 연기하는 존재에 가깝다.
이 형상은 가면의 성격을 띤다. 가면은 숨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역할과 정체성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얼굴은 고정되지 않고, 권위는 안정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형식에 대한 거리감과, 그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다. 이 초상에서 권위는 주장되지 않는다. 다뤄질 뿐이다.
색과 선, 경험이 만든 균형
강렬한 주황색 바탕 위에 노랑, 검정, 파랑이 겹친다. 색은 조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선은 흔들리고, 중첩되며, 중간에 끊긴다. 즉흥처럼 보이지만 무질서는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감각이 모든 선택을 지탱한다. 경험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질서로 기능한다. 젊은 시절의 파괴적 실험과 달리, 이 시기의 자유는 안정적이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균형이다. 노년의 회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 여기에 있다.
2026년 한국 전시에서의 현재성
정답보다 해석이 중시되는 사회, 고정된 정체성보다 유동적인 자아가 강조되는 흐름 속에서 〈상상의 초상화 I〉은 현재성을 획득한다. 닮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해석이 들어선다. 규칙이 물러난 자리에는 자유가 남는다.
K-문화가 세계로 확장된 이후, 한국의 전시는 명작을 나열하는 공간에서 벗어나 사유의 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작품은 노년의 예술이 어떻게 동시대성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초상화라는 장르가 끝난 자리에서, 회화는 다시 시작된다.
작품의 크기, 감상이 머무는 방식
크기는 초상화로서는 익숙한 비율에 속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멀리서 한눈에 읽히는 이미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선의 흔들림과 색의 겹침이 차례로 드러난다. 크기는 과시적이지 않지만, 관람자의 움직임을 조정한다. 빠른 통과를 전제로 한 이미지 소비와는 거리를 둔다.
이 작품은 짧은 응시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구성의 결이 달리 읽힌다. 처음에는 형상이 먼저 들어오고, 이후에는 선의 방향과 색의 충돌이 눈에 들어온다. 감상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시선 속에서 해석이 쌓인다. 이 초상은 즉각적인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머무는 시간을 전제로 완성된다.
작가: 파블로 피카소
작품명: 〈Portraits Imaginaires I(상상의 초상화 I)〉
재료: 석판화(Lithography)
크기: 82.5 × 62.8cm
제작연도: 1969년
참고사항: 마르셀 살리나스 제작
소장: 에스티에스그룹 & 꾸바아트센터
〈상상의 초상화 I〉은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얼굴이라는 형식이 감당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시험한다. 생의 끝에서 피카소는 닮음을 버렸다. 회피가 아니라 도달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도 현재형으로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