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외교②] 선언을 넘겨 실무로…AI·경제안보·사회 협력까지 넓어진 한·일 외교의 결
[KtN 박준식기자]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가 나라현 정상회담에서 공통으로 강조한 키워드는 ‘포괄’과 ‘실질’이었다. 이번 회담은 한일 관계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구체적인 협의와 제도화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전 정상회담들과 결을 달리한다.
공동언론발표에서 이 대통령은 “양국이 교역 중심의 협력을 넘어 경제안보와 과학기술, 국제 규범을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한 보다 포괄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일 협력을 기존의 수출입, 투자 관계에 한정하지 않고,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 질서, 규범 형성의 동반자로 격상시키겠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실제 합의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양국은 인공지능, 지식재산 보호, 경제안보 분야에서 관계 당국 간 논의를 개시하기로 했다. 정상 간 공감대를 실무 협의로 즉시 연결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선언 이후 후속 조치가 지연되거나 흐지부지되던 과거의 한일 외교 관행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경제안보 협력은 이번 회담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라는 인식이 공유됐다. 반도체, 첨단 제조, 핵심 소재와 부품 등에서 상호 의존도가 높은 양국이 경쟁을 넘어 협력의 틀을 제도화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인공지능과 지식재산 보호 협력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기술 경쟁이 곧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환경에서, 표준과 규범을 누가 주도하느냐는 중요한 외교 의제가 됐다. 한일 양국은 기술 개발 자체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규범과 제도 설계에서도 협력의 여지가 크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사회 분야 협력 확대도 이번 회담의 중요한 특징이다. 외교 의제가 경제와 안보에 집중되던 기존 구도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이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랐다. 저출생과 고령화, 농업과 방재, 자살 예방 등은 한국과 일본이 동시에 겪고 있는 구조적 과제다.
양국은 그동안 운영해 온 ‘한일 공통 사회문제 협의체’의 성과를 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기로 했다. 특히 지방 성장과 균형 발전은 중앙집중과 지역 소멸이라는 공통 문제를 안고 있는 양국에 모두 중요한 과제다. 정상 차원에서 이 문제가 언급됐다는 점은, 사회 협력이 부차적 의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초국가 범죄 대응은 이번 회담에서 실질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분야다. 스캠 범죄를 비롯한 국제 범죄에 대해 공동 대응을 강화하기로 하고, 한국 경찰청 주도로 구성된 국제공조 협의체에 일본이 참여하기로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양국 간 공조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합의문도 채택하기로 했다.
이는 디지털 범죄가 일상화된 현실을 반영한 조치다.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 사기와 온라인 범죄는 개별 국가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한일 양국이 제도적 공조에 합의했다는 점은, 실무 현장에서 즉각적인 협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과거사 문제에서도 신중하지만 분명한 진전이 이뤄졌다. 양국은 1942년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유해에 대해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조세이 탄광 사고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포함해 183명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오랜 시간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이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대규모 합의나 정치적 선언은 아니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실질적인 조치를 추진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한일 과거사 문제 접근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감정적 대립이나 정치적 공방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을 통해 신뢰를 쌓겠다는 방향성이다.
안보 분야에서는 기존의 공조 기조를 재확인했다. 양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구축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대북 정책에 있어 긴밀한 공조를 이어가기로 했다. 또한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일 협력,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인식을 같이했다.
동시에 동북아 차원의 협력 필요성도 언급됐다. 한중일 3국이 공통점을 최대한 찾아 소통하고 협력해 나가야 한다는 인식은, 한일 관계를 특정 진영이나 구도에 가두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복합적인 외교 환경 속에서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번 나라현 정상회담의 또 다른 특징은 합의의 ‘구조’다. 대부분의 의제에서 정상 간 공감대 형성에 그치지 않고, 실무 협의 개시, 합의문 채택, 제도화라는 단계가 함께 제시됐다. 이는 이재명 정부 외교의 한 가지 특징으로 꼽힌다. 방향 제시와 실행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접근이다.
한일 관계는 오랫동안 선언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이번 회담은 그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AI와 경제안보, 사회 협력, 범죄 대응, 과거사까지 이어진 이번 합의들은 모두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축적될 성격의 사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