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⑥] Picasso SKETCHBOOK

창작이 멈추기 전, 피카소의 사고가 머문 자리

2026-01-30     박준식 기자
Picasso SKETCHBOOK 최초 공개 예정, 에스티에스그룹 & 꾸바아트센터. 사진=에스티에스그룹 & 꾸바아트센터,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1955년 11월 20일부터 1956년 1월 3일까지 이어진 피카소의 스케치북은 일정한 목적을 향해 정리된 노트가 아니다. 연필 드로잉이 페이지마다 이어지지만, 하나의 결론을 향해 수렴하지 않는다. 선은 반복되고, 형태는 바뀌며, 비례는 고정되지 않는다. 스케치북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기보다 판단이 생성되고 수정되는 흐름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스케치북은 제작 방식부터 분명하다. 원본과 같은 판형, 같은 제본 순서를 유지했고, 프랑스에서 제작된 특수 종이에 콜로타입 공정을 적용했다. 연필 선의 농담과 종이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미려함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기록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조건에 가깝다. 선의 흔들림이나 필압의 차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이 조형 판단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스케치북은 감상용 이미지가 아니라, 분석을 전제로 한 자료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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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연필 드로잉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선은 형태를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사고의 이동을 만들어낸다. 어떤 장에서는 얼굴 윤곽이 여러 번 겹쳐지고, 다른 장에서는 눈과 코의 위치가 급격히 바뀐다. 선이 멈췄다가 다시 이어지는 지점마다 판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사라지는 정보들이다. 스케치북에는 그 이전의 상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기록 안에는 연필 드로잉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장의 컬러 리소그래프가 삽입돼 있다. 1959년 파리에서 제작된 이 판화는 유실된 한 페이지를 대신해 피카소가 직접 넣은 것이다. 연필로 다시 채우는 대신 판화 작업을 선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스케치북을 계속 진행 중인 노트로 두지 않고, 하나의 기록 단위로 완결하려는 판단이 읽힌다. 과거의 기록을 현재의 작업으로 보완한 이 선택은 창작 과정에 대한 피카소의 인식을 보여준다.

리소그래프는 이 스케치북에서 예외적인 장식이 아니다. 피카소는 1950년대 중반 무를로 스튜디오와의 협업을 통해 리소그래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회화의 부속 수단이 아니라, 독립적인 조형 언어로 다뤘다. 스케치북 안에서 드로잉과 판화가 나란히 존재하는 구조는 매체 간 구분을 흐린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사고의 흐름은 하나로 이어진다. 스케치북은 그 흐름이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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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얼굴의 반복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얼굴은 초상을 남기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눈과 코, 입은 해부학적 질서를 따르지 않고 분리되거나 결합된다. 얼굴의 중심은 고정되지 않고, 페이지마다 이동한다. 특히 자클린 로크와 맞물린 얼굴 구조는 말년 피카소 작업으로 이어지는 방향을 이미 이 시기에 형성하고 있다. 인물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얼굴이라는 구조를 실험하는 방식이다.

스케치북의 페이지들은 서로를 보완하지 않는다. 병렬적으로 놓인다. 하나의 형태가 다음 장에서 수정되거나 폐기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구조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병렬성은 피카소 작업의 중요한 특징이다. 하나의 답을 찾기보다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유지한다. 스케치북은 그 가능성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은 미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완성작만으로는 판단의 근거를 파악하기 어렵다. 스케치북을 통해 어떤 구조가 유지됐고 어떤 구조가 사라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해석은 추측이 아니라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다. 스케치북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자료가 아니라, 설명의 출발점에 놓인다.

Picasso SKETCHBOOK 최초 공개 예정, 에스티에스그룹 & 꾸바아트센터. 사진=에스티에스그룹 & 꾸바아트센터,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전시에서 스케치북이 갖는 역할도 다르다. 벽에 걸린 작품처럼 한 장면을 제시하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이 관람의 중심이 된다. 관람자는 결과를 보는 대신 사고의 흐름을 따라간다. 감상 중심의 전시에서 구조를 이해하는 전시로 시선이 옮겨간다.

교육적 측면에서도 의미는 분명하다. 드로잉은 연습이 아니라 설계다. 선을 긋는 행위는 감각의 분출이 아니라 구조를 점검하는 판단이다. 이 스케치북은 예술가가 어떻게 사고를 조직하는지 보여주는 실제 자료다. 창작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이보다 구체적인 문헌은 드물다.

피카소 스케치북은 회화와 판화, 조각으로 흩어진 결과물들을 하나의 내부 구조로 연결한다. 작업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결과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예술은 완성된 순간에 멈추지 않는다. 그 완성으로 이어진 과정이 함께 남을 때 구조가 드러난다. 피카소 스케치북은 그 과정을 가장 밀도 있게 보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